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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추모 공원에서 인천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솟은 수봉 공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34
한자 大韓民國最初-追慕公園-仁川文化-中心-壽峰公園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학균

[생활 속에서 산의 의미]

현대인의 삶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휴식이라고 볼 때 산은 도시민들의 귀한 안식처이다. 전쟁으로 인해 피난민이 북에서 내려오며 마을을 형성할 때도 우선 산을 선택하여 거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인천광역시 동구의 수도국산과 마찬가지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수봉 공원 기슭도 그들에 의하여 주거 지역이 형성 되었다. 근대로 접어들며 무허가 주택이 증가되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감에 따라 양성화되어 주거 지역이 형성된 현상은 이곳도 예외일 수가 없다.

[전설과 역사속의 산]

수봉산(壽鳳山)은 해발 104m의 야트막한 산이다. 부평의 등줄기라고 부르는 계양산과 같이 서해에서 떠내려 와 생긴 산으로 동쪽 산줄기 외는 삼면이 바닷물이 넘나들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섬 같은 산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광역시 동구 그리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일대를 과거에 행정 구역상 다소면(多素面)이라 불렀다. 다소란 물웅덩이가 많아 물이 풍부하여 농사가 잘 되는 터라는 뜻이고, 다소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었는데 마을 이름이 다랭이 마을이었다. 다랭이는 곧 다남(多男)을 뜻하는 말로 마을에 남자들만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들이 귀한 집 규수들이 아들 낳고 싶어 치성을 드렸다는 구전이 아직도 남아 있는 영산(靈山)이다. 수봉산(壽鳳山)은 원래 수봉산(水峯山)이었는데, 물 수(水)가 목숨 수(壽)로 바뀌며 봉 자도 산봉우리 봉(峯)에서 봉황 봉(鳳)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물과의 인연을 설명한다면 승기천의 발원지가 수봉산 남서쪽 60고지 근처 독정이 고개 쪽에서 흐른 내가 흘러 들어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도시화로 모습이 변한 지금에서는 확인하기 힘든 설에 불과하다.

수봉산이 호국의 영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72년 8월 15일 응봉산[자유 공원]에 있던 현충탑을 정상부로 옮겨 현충일 행사를 이곳에서 매년 거행하게 되면서부터다. 이 탑은 자유 공원에 있을 때는 충혼탑이라 하였으며 1953년에 건립된 것이다. 반면 수봉산에는 자유 총연맹 건물이 있고 ‘통일관’이 인천 시내 각급 학교의 반공 교육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서쪽 편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기념하여 1980년 9월 15일 세운 인천 지구 전적비가 있어 6·25 전쟁 전몰장병을 기리는가 하면 북한 출신 실향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모신 망배단도 있다. 현충탑을 위시하여 재일 학도 의용군 참전비 등으로 수봉산은 전쟁의 아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호국의 산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복합 문화 공원 수봉산]

수봉산은 다중집합적인 장소가 되어 곳곳에 체력 단련장과 테니스장, 배드민턴장이 들어서며 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또 다른 명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82년 인천시가 경기도에서 독립, 인천직할시로 변함과 아울러 1982년 9월 22일에 인천 문화 회관을 개관하고,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인천광역시 연합회[일명 인천 예총]가 관리 운영을 하게 되면서 수봉산은 문화 지대로 변환기를 맞게 되었다. 본래 유흥 음식점으로 짓던 건물이었으나 건물주의 재정 여건으로 인해 인천시가 매입, 전산 통계 부서로 사용하다가, 일 년 후 문화의 요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예술 문화 단체 총연합회 인천광역시 연합회 산하 9개 단체[국악, 문인, 미술, 무용, 사진, 연극, 연예, 음악, 영화]가 인천 문화 회관에 상주하면서, 2개의 전시장과 1개의 소극장을 운용하며 합창 연습실, 강의실 등에서 시민들의 문화 향유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문화 회관 부설로 국악 문화 학교를 개설하여 해금, 가야금, 대금 등 다양한 국악기의 연주 기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 탈춤 전수관이 있어 야외 공연장에서 상설 공연이 있는가 하면, 연중 상하반기 전국 무형문화재 초청 공연을 진행하며 문화 공원의 이미지 창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궁으로 호연지기를 키우는 무덕정이 있으며 AID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수봉 도서관이 건립되었다. 더욱이, 절개지를 활용하여 인공 폭포를 만들어서 휴식 공간 겸 독서의 요람으로 그 기능을 십분 발휘하고 있어서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수봉 공원에는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놀이 시설이 있어 유치원생들이 즐길 수 있었으나 여러 시설물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그 흔적은 찾기 어렵다. 1979년에 민간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 시설은 27년간 운영됐다.

[수봉산의 주변 환경]

여러 갈래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있지만 제물포역 앞의 큰 대로에서 오르는 주도는 차량이 오르내리는 4차선의 도로로 불편함이 없다. 주변에 부용사(芙蓉寺)가 있으며 좌측에는 정법사가 있어 수봉산을 지키는 사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래 작은 암자였던 부용사는 1924년에 초대 주지 만선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나한전은 6․25 전쟁 3년 뒤에 세워졌고, 대웅전은 1999년에 증축하였다. 득남을 원하는 처자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입소문으로 신자들의 발길이 잦다. 전쟁으로 발생된 고아들을 받아 동자승으로 입적시켜 보살피는 등, 지금까지도 사회의 공익에 헌신하는 사찰이다. 일반 사찰보다 부용사의 특이한 점은 선원(禪院)으로 조계종 소속이며 비구니들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이다. 정암사도 작은 암자였다. 옛 이름은 승암 정사로 승암이란 법명을 가진 비구니가 세워 오늘에 이르렀으며 1970년대까지 암자에 머물던 승암은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수봉 공원 소재의 행정동명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 4동이다. 이 숭의동은 일본식 이름으로 원래 우리의 옛 이름은 장외리다. 이 장외리에 가장 특이한 사항은 양조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봉로를 따라 수봉 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와룡 소주는 1960년대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나 맛을 아는 소주이다. 와룡 소주의 양조장에서 고구마를 삶는 듯한 달달한 냄새가 났으며 겨울에도 하얀 수증기를 날리며 폐수를 뿜어댔다고 한다. 지금은 늙은 술꾼들이 젊은 애주가 시절 와룡 소주를 사들고 수봉산에 올라 됫병 째로 들이켰다는 무용담이 지금도 전해지는 것을 보면 와룡 소주는 지금의 2홉짜리 소주보단 4홉짜리, 1되짜리 병 소주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수봉산 언저리에서는 찾기 힘든 광경이지만, 양조장이나 1960년대 저수지가 있었다는 기록, 수봉산의 수(水)자 등을 보면 수봉산에 물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수봉 도서관 입구의 주차장은, 1960년 초 연식 정구가 유행했던 시절 민간인이 운영하던 중앙 테니스장이 있었던 터로, 테니스 동호인회가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아야 할 수봉 공원]

인천광역시의 주산은 문학산과 계양산이다. 수봉산은 중구의 응봉산과 마주보며 있는 작은 산으로 문화의 지역색을 잘 나타내며 주민을 잘 아우르고 있다. 휴식 공간과 편의 시설, 공공건물이 더 들어서며 그나마 남은 자연을 훼손한다면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강산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개발의 논리로 그나마 남아있는 수림을 베어내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될 것이다. 수봉산수봉 공원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사람들을 위한 문화의 중심으로,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김광수, 『향토 인천』(1988. 11)
  • 인천광역시사 편찬 위원회, 『인천광역시사』(인천광역시, 2010)
  • 김길봉, 『수봉산 에레지』 작고 문인 선집 4집(인천 문인 협회, 2011)
  • 인터뷰(부용사 주지 선덕, 여, 50세, 2012. 6. 18)
  • 인터뷰(인천 문화 회관 직원 이정환, 남, 74세, 2012.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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