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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32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집필자 김상태

[개설]

교통과 운송 수단의 발달은 인간의 삶의 모습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화시킨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의 중심지답게 많은 철길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련한 기억 속의 철길이 더 많다.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던 수인선, 인천과 부두를 연결하는 화물 열차선, 남인천역주안역을 연결하는 주인선(朱仁線), 화물 부두와 동양 화학선. 철길과 관련한 우리들의 기억을 되살려 봄으로써 철길에 대한 아련한 단상들을 끄집어 내보자.

[주인 공원으로 남은 주인선]

정처 없이 무심하게 걷다 문득 고개 들어 보니 동네 구멍가게 이름이 ‘철길 슈퍼’이다. 뜬금없는 가게 이름이지만 이곳에 철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동네 구멍가게는 잊지 않고 있었다. 20년도 채 안 된 철길은 뜯겨 없어졌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무심한 방랑객은 철길 슈퍼에서 주인선을 찾는다.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전후 회복기 정부는 교통 사업 5개년 계획에 의거 주인선을 추진한다. 동서로 자리 잡힌 도로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경인선주안역수인선남인천역 사이에 개설된 3.8㎞ 길이의 철로를 만든 것이다. 이름도 주안역의 ‘주’ 자와 남인천역의 ‘인’ 자를 합쳐 주인선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57년 9월 26일 착공한 주인선은 1959년 2월 20일 준공하여 당일 오전 10시 운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총공사비는 한화 3억 1천 5백 45만 환, ICA 원조 10만 불이 소요되었다. 이 철로가 완공됨으로써 인천항의 군수 및 여러 가지 화물을 보다 신속히 후방에 수송하여 지방 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당시의 신문은 전망하였다.

그러나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3월 1일 영업을 개시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1달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철로는 맥없이 녹만 슬어가고 방치되고 있었다. 애초 주인선은 6·25 전쟁이후 인천항의 확장에 따라 화물 증가[군수 물자 및 유류]로 인천항의 하역 장소 등이 번잡하여 화물 수송에 혼란이 생겨 이를 해소하고, 중요 물자를 신속히 수송하기 위해 건설키로 한 것이었다. 종래 석유·휘발유 및 각종 군수용 기계류 등은 남인천 저장소에서 인천역까지 수송하면 미군 측에서 도난 방지의 경비 책임을 맡고 각종 수송 물자를 목적지까지 배차해 왔다. 그런데 물자 도난을 방지하는 경비 시설이 남인천역에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미군 측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주인선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이 적지 않은데 미군이 요구하는 남인천역의 경비 시설에 필요한 예상 경비가 약 3천만 환 이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주무 부처인 교통부의 입장은 “유리 몇 장 없어진다고 기천만 원씩 경비를 들여 가시 철망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물류의 중요성보다 현실적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던 우리의 실정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교통부에서는 1959년 6월 29일 “주인선은 7월 1일부터 주인선 영업을 개시하는데, 1일 4왕복의 열차 운행을 할 것이고, 이 열차는 모두 미군용 화물 수송에 충당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주인선은 전적으로 미군용 화물 수송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주 영업이 미군용이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6월 29일 발표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는 주인선이 미군 전용선으로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인선 선로는 화물 전용으로 사용되었지만 1970년대 말까지 여객 목적으로 일부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주한 미군 장병들이 인천항을 통하여 전출입할 때 이 철도를 이용한 것이다. 또한 한때 인천 거주 징병 대상자들이 남인천역이나 남부역에 집합하여 입영 열차를 타고 주인선을 거쳐 충청남도 논산의 육군 제2 훈련소까지 실려 갔고, 가족들과 이곳에서 작별하였다.

굶주리고 헐벗었던 시절 주인선에 화물을 싣고 달리는 미군 화물과 전출입하는 미군을 싣고 달리는 기차를 철길 주변 동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보았을까? 그리고 화물선과 나란히 달리던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선은 현재 폐선이 되었고 주인선이 있던 부지는 주인 공원으로 바뀌어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가끔씩은 침목도 보이고, 폐철로도 보여 이곳에 철길이 있었다는 것을 말없이 전해 줄 뿐이다. 또 제물포역 인근에서 어딘지 어색한 주인선 고가의 흔적을 아직도 찾아 볼 수 있다.

[동양 화학선]

1977년 이리역에서 있었던 대 폭발 사고. 많은 인명 피해가 났던 아련한 기억 속에 잠들고 있던 참사와 동양 화학선이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당시의 사고 화학 열차는 동양 화학선을 통하여 반출되어 나갔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위치한 OCI[옛 동양 화학 공업] 인천 공장은 단순히 화학 공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철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 화물 운송 철도를 동양 화학선이라 한다. 그러나 동양 화학선은 인천역 부속의 전용선으로 정식 노선은 아니다. 현재는 2011년 공장 내부 도로 공사로 인하여 그 흔적만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철도는 동양 화학 공업 인천 소다회 공장의 화물을 운반하기 위하여 설립된 연장 5.2㎞, 폭 1,435㎜의 표준 궤간의 철도였다.

동양 화학 공업 인천 소다회 공장에서 폐선된 수인선의 남인천~송도 구간의 일부를 표준궤로 다시 설치한 뒤에 수인선과 구분하여 흔히 동양 화학선이라 하는데 인천항을 통해 수입된 원료가 운송되어 동양 화학 공업 인천 소다회 공장의 각종 산업용 화공품을 생산하였다. 그 제품 중 일부는 지금은 이전하였지만 근처에 위치했던 한국 화약에 원료로 공급되기도 했다.

동양 화학선은 1981년 1월 21일 추가로 궤도 부설 공사를 준공하였고, 공사 비용은 총 378만 2908원이 소요되었다. 또 1988년에는 송도 제3 건널목 확장 공사가 있었으며 총 428만 5201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도심 확장에 따라 공장들의 이전과 함께 철도의 효용성도 없어져 1995년 폐선되었고, 수인선 복선 전철화 사업이 결정되자 2007년부터 철거 공사에 들어가 현재 동양 화학 내부에 그 자취만이 남아 있다.

동양 화학선은 개인 기업에 설치된 철길이기에 그리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산업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산업의 폐해로 인해 환경 오염과 공해 등의 문제 들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세수 증대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산업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한쪽이 부각되면 다른 한쪽은 부정되기가 십상이다. 어찌 보면 인천의 철길은 모두 이런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세수입이나 고용 증대의 면도 있지만 대다수 인천 시민은 이로 인한 폐해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이전의 이런 산업화가 중앙 정부의 세수 증대 외에는 실질적으로 인천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화물 부두선의 석탄 이야기]

인천역을 출발한 화물 기차는 연안 부두 석탄 부두가 목적지이다. 석탄 부두에서 석탄을 실은 화물 기차는 다시 강원도로 이동을 한다. 아직도 이 화물 기차는 강원도로 먼 길을 떠나는데, 그 이유는 시멘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화력으로 석탄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석탄은 다른 어떤 연료보다도 고열을 내는 데 효과적인 에너지원이다. 때문에 적어도 시멘트를 만드는 연료로서 석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천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석탄가루와 동거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한때 이 석탄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의 탈취 대상이기도 했다. 달리는 석탄 차에 기관사 몰래 올라타서 마구잡이로 석탄을 손으로 긁어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떨어진 석탄을 주워 모아 연료로 사용했던 아련한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석탄이 갈취 당했을 때 과연 기관사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모두들 힘들던 시절 애써 눈감아 주었기에 화차에 올랐던 모두들이 범죄자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이라 하는가.

석탄 부두로 이동을 하는 선로를 따라가다 보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차가 한 번에 석탄 부두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남부역에서 기관차가 끌고 온 화차들을 떼어 놓고 꼬리 쪽으로 혼자 이동해서 꼬리 부분에 기관차를 연결하여 석탄 부두로 들어가는 것이다. 강원도의 태백 쪽에서 볼 수 있는 스위치백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이런 모습도 열차를 끝까지 따라다니지 않으면 알아 볼 수 없고, 열차의 운행으로 신호등의 대기 시간도 길게 느끼는 운전자들에게 기차의 스위치백을 하는 시간은 지루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지금 남부역은 철길만 휑하니 놓여 있고, 주변의 주택들은 힘겹게 버티고 있다. 주택 뒤쪽으로 수인선으로 연결되는 폐선을 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남인천역의 모습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헷갈리는 역 이름]

인천에는 별칭으로 부르는 이름이 세 개인 역이 두 곳이 있다. 축현역·상인천역으로 불리던 동인천역과 인천항역·수인역으로 불리던 남인천역이 그것이다.

1937년 개통 당시 남인천역의 본래 이름은 여주·이천 쌀과 군자·소래의 소금 수탈이라는 부설 목적이 반영되어 인천항역이었다. 그러다가 1946년 수인선이 국철로 흡수, 통합되면서 1948년 일제 강점기 때의 이름을 버리고 수인역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955년 다시 남인천역으로 개칭되었다. 마지막으로 1973년 남인천역이 폐역되고 표준 궤도가 부설되었다. 남인천역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있는 남인천 신호소역(信號所驛)[Signal Station]이라 불리었던 곳을 남부역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인천항역·수인역·남인천역·남부역을 동일한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남인천역과 남부역이 불과 1㎞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역은 별개의 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대한인천」이라는 지도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는 수송 열차를 타기 위해 인천 공설 운동장에 입영 대상자들이 모였다. 운동장에서 역으로 이동할 때 그들이 도착한 역은 모두 수인역이었다. 그런데 수인역의 위치는 사람마다 약간씩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수인역이라 이야기하는 위치가 하나는 수인역이고 하나는 남부역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기억하는 수인역은 이름이 같지만 그 위치가 차이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 곳을 동일하게 인식하여 지금까지도 인천항역·수인역·남인천역·남부역을 같은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역명과 위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억에만 충실하다. 남인천역의 위치는 지금의 신생동 삼성 아파트 남쪽 선로변이고 남부역의 위치는 능안 삼거리 동쪽의 넓은 공터이다.

이렇듯 변화무쌍한 역 이름의 변화는 많은 이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리게 하였고, 사람들 기억 속 역 이름만이 우리에게 각각의 별개 역인 것처럼 전달되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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