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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90
한자 富平李氏
이칭/별칭 계양 이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집필자 김상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시조 이희목(李希穆)
입향시조 이희목(李希穆)
본관 부평 - 경기도 부천시 일대
세거|집성지 관교동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세거|집성지 문학동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세거|집성지 주안동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세거|집성지 학익동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세거|집성지 용현동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정의]

이희목(李希穆)을 시조로 하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세거 성씨.

[개설]

부평 이씨(富平李氏)는 이희목을 시조로 하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문학동·학익동·주안동·용현동 등지에 세거하였던 성씨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던 이세주(李世冑),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원도(猿島)[인천광역시 중구에 있었던 섬. 지금은 육지와의 사이가 매립되었다.]에 진을 치고 항전하였던 이윤생(李允生)이 부평 이씨이다.

[연원]

『부평 이씨 대동보(富平李氏大同譜)』에 따르면, 부평 이씨의 시조는 이희목이다. 이희목은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워 삼한 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관계(官階)[관리나 벼슬의 등급]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 이희목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있어 확실하지 않다.

부평 이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4세손 이정공(李靖恭) 대의 일이다. 이정공은 문과에 급제한 뒤 1062년(문종 16) 시예부 외랑(侍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 「삼례도(三禮圖)」와 「손경자서(孫卿子書)」를 새로 새겨[新彫] 바쳐 포상을 받았다.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1086년(선종 3)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上書吏部事)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졌다. 이를 연유로 후손들이 부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현황]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다르면 부평 이씨는 전국에 1,815가구, 총 5,808명이 있으며, 인천광역시에는 678가구, 2,080명이 있다.

[관련 유적]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442번지에는 병자호란 당시 전사한 이윤생, 그리고 자결한 부인 강씨(姜氏)에 대한 정려(旌閭)[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호][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위치하고 있다. 이윤생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원도에 진을 쳤다. 이는 청나라 군대의 유격병들이 내왕하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11월 24일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으나 이윤생의 부대에 의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일단 패주하였으나 이튿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강화도가 청에게 함락된 지 3일 후인 1637년(인조 15) 1월 25에 이윤생은 34세로 전사하였고, 부인 강씨는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1861년(철종 12)에 정려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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