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병자호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69
한자 丙子胡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상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쟁
관련인물/단체 이상재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6년 12월연표보기 - 병자호란 발생
종결 시기/일시 1637년 1월연표보기 - 병자호란 종료

[정의]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개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이상재(李尙載)[1607~1636]가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䂓)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정하여, 인조가 피란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향하여 진군하다가 용인에서 적의 협공을 받아 전사하였다.

[역사적 배경]

1627년 후금(後金)[뒤의 청]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하였고,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외교 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이에 조선의 여론은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에 대해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 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한씨(韓氏)의 문상(問喪) 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다.

청은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 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1636년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청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를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의 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예친왕(禮親王) 대선(代善),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과 패륵(貝勒)[만주어로 부장(部長)] 악탁(岳託)·호격(豪格)·두도(杜度) 등을 이끌고 다음 날 몸소 조선 침입에 나섰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향하던 길을 우여곡절 끝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경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은 직접적으로 병자호란과 관련한 사항이 없으나, 이 지역 출신의 이상재가 남한산성으로 출정하여 활약하였다.

이상재는 1630년(인조 8) 진사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에 명경시(明經試)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나이 27세였다. 이상재는 승문원(承文院)으로 선발되어 들어가서 관례에 따라 저작랑(著作郞)에 올랐다. 이때 중국 사신 학사(學士) 강왈광(姜曰廣)이 이상재의 준수한 의용(儀容)[몸을 가지는 태도. 또는 차린 모습]을 보고 경탄하고, 이상재의 시를 요구하여 받아 갔는데 그 시가 『황화집(皇華集)』[조선 시대 명나라의 사신과 조선의 원접사(遠接使)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은 책]에 실려 있다.

이상재는 1636년(인조 14) 8월 금정도(金井道)[조선 시대 충청도 청양(靑陽)의 금정역(金井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찰방(察訪)[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外職) 문관의 벼슬]으로 나갔다. 당시 북로(北虜)[북쪽에 있는 오랑캐]가 분쟁을 일으켜 조야(朝野)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상재는 병마(兵馬)를 검열하고 도망친 군졸을 수색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이상재가 무재와 지략이 있음을 알고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이상재는 관자(關子)[조선 시대에 동등한 관부 상호 간 또는 상급 관부에서 하급 관부로 보내던 공문서]를 받아본 즉시 달려가서 “군부(君父)가 성안에 포위되어 있는데 신자(臣子)가 어떻게 분문(奔問)의 의리를 늦출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 가닥의 외로운 성이 마치 바위에 눌린 새알과 같이 위태로우니, 지금의 계획으로는 갑옷을 단단히 입고 달려가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니, 사기(辭氣)[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가 격절(激切)[말이나 글 따위가 격렬하고 절실함]하였다. 이를 지켜본 정세규는 깊은 탄사를 보내고 군사를 독려하여 출정하였다.

정세규의 부대는 밤낮으로 달려가서 수원산성(水原山城)에 이르자마자 남한산성의 상황을 정탐하여 보았으나, 남한산성이 온통 적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소식이 단절된 상태였다. 이때 정세규는 군중(軍中)의 크고 작은 기무(機務)를 이상재에게 맡겼는데, 모두 적절히 조치하여 사졸들이 모두 쏠리고 승복하였다. 이상재정세규에게 “우리는 보병이고 적은 모두 기병인데다 군병의 숫자도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습니까?” 하니, 정세규가 “외로운 군대로 서둘러 강적에게 덤벼들었다가는 그 형세는 기필코 좌절되고 말 것이므로 일시 후퇴하여 오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형세를 살펴보아서 내지로 향하는 것이 좋겠으나 믿을 만한 요새지가 없으니 양지(陽智)의 뒷산으로 올라가서 동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세규의 부대는 수성(隋城)에서 만의산(萬義山) 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양지읍 밑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들리는 소식에 ‘경상도 병사 민영(閔栐)이 지원병을 이끌고 이천(利川)에 도착하였으나 적병이 남한산성 동쪽에 수 리(數里)나 뻗치게 주둔하고 있어서 진군을 하자니 함부로 범접할 수도 없고 후퇴를 하자니 군졸들이 분산될 것이 우려스럽다.’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정세규이상재는 “헌릉(獻陵)은 남한산과 퍽 가깝고 수목이 빽빽하여 군병을 이끌고 들어가 거점을 삼을 수 있고 여기서 다시 경창(京倉)의 곡식을 운반하여 온다면 두어 달은 넘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미현(彌峴)을 넘어 용인(龍仁)을 거쳐서 험천(險川) 가에 이르렀으나, 날이 벌써 저물어서 장수와 군병이 모두 지친 상태여서 북쪽 산기슭에 진을 쳤다.

이튿날 새벽녘에 적병이 뒤쪽에서 기습 공격을 하자 정세규의 군사들은 본래 무기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적병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겁을 먹고 먼저 뿔뿔이 흩어져서 후진(後陣)의 최진립(崔震立)이 전사하였다. 이상재가 급히 대장군의 군막으로 달려가서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라고 하니, 정세규는 탈출하여 피하라고 하였다. 이상재는 분연히 거절하여, “공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십니까? 신하란 각기 군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직분이고 또 상관이 여기에 있으니 더더욱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상재는 인신(印信)[도장이나 관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가지고 와서 다시 마졸(馬卒)에게 건네며 “이것은 공기(公器)이다. 네가 가지고 돌아가되 잃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수장(首將)이 또 적에게 좌절되어 겨우 몸만 빠져나왔고, 패군(敗軍)이 앞 다투어 점사(店舍)로 탈주한 자가 수백 명이었다. 이에 이상재가 “남아(男兒)가 죽을지언정 어떻게 도망을 쳐서 구차히 혼자만 살아남으려 하겠는가?”라고 외치자 도망쳤던 군사들이 다시 조금씩 모여 들였다. 이상재가 군량더미 위에 올라가 활을 당겨 적에게 쏘니 많은 적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고서 서로 경계하며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때 적군에서 날아온 화살이 연거푸 이상재의 가슴과 어깨를 맞혔으나 이상재는 태연히 살촉을 뽑아 버리고 여전히 활을 쏘아 댔다. 하지만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한 데다 또 적의 화살을 맞아서 결국 일어나지 못하였다.

[결과]

병자호란 이 끝난 뒤 조선과 청은 종번 관계(宗藩關係)로 굳어져 가면서 청의 위협과 조선의 복종이 강요되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료시키기 위한 화의 교섭을 통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으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군신 관계가 재확인됐다.

이상재의 시신은 오랜 동안 모래밭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상재의 처갓집 종 춘남(春男)이 군졸의 한 사람으로서 남한산성을 내려와서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을 하였다. 이상재의 시신은 1637년(인조 15) 3월에 인천 도장리(道長里) 선영 밑으로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하였다가, 같은 해 9월에 손향(巽向) 터에 영폄(永窆)[완전하게 장사(葬事)를 지냄]하였다. 이상재는 사후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겸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을 추증하였다. 또한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려졌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