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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08
한자 世居姓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집필자 배성수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하여 살아오고 있는 성씨.

[개설]

우리나라에서 성씨(姓氏)가 발생한 근원은 고대 중국의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족을 중심으로 다른 씨족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인 호칭이 성(姓)으로 나타난 것인데, 처음에는 왕실 내지 귀족, 고급 관료층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개국(開國)과 국가 변란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나 귀화인(歸化人)에게 거주하는 지역 등의 명칭을 붙여 성씨를 하사하면서 성씨 사용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것은 태조(太祖) 왕건(王建)[877~943]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개국 과정부터다.

[변천]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 따라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살던 지역 명에서 연유한 군호(君號)와 식읍(食邑)을 내리고 성씨를 하사한 사례가 많았다.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살면서 지역 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거 성씨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일반 서민까지 성씨가 사용된 것은 고려 중기 과거(過擧)의 영향으로 관료 제도가 보편화된 이후부터 가능해졌다. 또 노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 말 노비 제도의 혁파와 1908년 호적법이 제정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1908년 호적법이 정비될 때의 성씨 관련 자료를 보면 성을 갖지 못한 사람이 13%나 많았다.

한편 조선 초기에 4,296개에 달하던 본관 별 성씨가 조선 중기에 1,000여 개로 줄어들었다. 고려 시대에 유(柳), 최(崔), 김(金), 이(李)씨의 순이던 성씨가 조선 시대에 이, 김, 박(朴), 심(沈)씨 순으로 변하더니 현재는 김, 이, 박, 최씨 순으로 변하였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경우 조선 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인천의 토성에는 이·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 등 여섯 성씨가 있었고, 당성(唐城)에서 들어온 박씨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기록인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인천의 토성으로 이씨·공씨·하씨·채씨·문씨만을 전하고 있어 전씨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의 읍지에는 여섯 성씨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지역의 지지(地誌) 자료와 마찬가지로 읍지의 편찬 과정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여과 없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황]

인천 이씨는 가야 출신인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토성으로 지명이 변화될 때마다 소성(邵城), 경원(慶源), 인주(仁州) 등으로 본관도 따라서 변화해 왔다.

인천 채씨는 고려 중기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된 채선무(蔡先茂)를 시조로 하는 인천의 세거 성씨로 지금은 인천보다는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 문씨 역시 고려 시대부터 인천 지방에 세거하였던 성씨로 시조인 문필대(門必大)는 고려의 감문위랑장(監門衛郞將)을 지낸 인물이다.

대부분의 도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경우에도 지금은 외지에서 유입된 주민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런 이유로 인천 이씨와 인천 채씨, 인천 문씨를 제외한 나머지 토성들은 거의 사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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