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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운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03
한자 黃運祚
이칭/별칭 사용(士用),오수(寤修),도천(道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오현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학자|서예가
성별
본관 창원(昌原)
대표관직 통정대부|인천 부사|돈령부 도정
출생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황운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황운조 인천 도호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98년연표보기 - 황운조 돈령부 도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99년연표보기 - 황운조 인천 도호부사 재임
몰년 시기/일시 1800년연표보기 - 황운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14년 - 황운조 효행으로 향리에 정문이 세워짐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선정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인천향교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학자, 서예가.

[가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용(士用), 호는 오수(寤修), 도천(道川)이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지소(芝所) 황일호(黃一皓)의 현손이다.

[활동 사항]

황운조(黃運祚)[1730~1800]는 1797년(정조 21) 7월 합천 군수로 있다가 인천 부사로 부임하여 치적을 많이 쌓았으며,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같은 해 12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다음해인 1798년(정조 22) 12월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에 제수되었다. 황운조의 후임으로 인천 부사에 재임 중이던 서직수(徐直修)가 1799년 1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황운조는 인천 부사에 재임되었다가, 다음해 2월 인천도호부 관아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황운조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서도(書道)에 힘써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윤순(尹淳)·김상숙(金相肅)과 함께 강도 삼절(江都三絶)로 불리었다. 황일호의 신도비에 글씨를 썼고,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김재구(金載久) 묘의 묘비문을 썼으며, 쌍봉사(雙峯寺) 사적비(寺蹟碑)를 썼다.

1797년(정조 21) 왕명에 따라 『통감강목(通監綱目)』과 『춘추좌전(春秋左傳)』의 ‘강(綱)’을 써서 바쳐 가자(加資)되었다.

[상훈과 추모]

인천 부사로 재직 중에 ‘부사 황공 운조 청덕 선정비(府使黃公運祚淸德善政碑)’를 비롯한 선행비(善行碑) 2기가 세워졌으며, 효행(孝行)으로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효행으로도 향리에 명성이 널리 알려져 1814년(순조 14) 정문(旌門)이 내려졌고, 아직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의 처음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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