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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65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상태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역사.

[연혁 및 행정 제도]

1392년 조선이 개국하였지만 아직은 전 시대인 고려 시대의 행정 제도를 정비하지 못하였다. 인천이라고 하는 지명은 조선이 개국하여 1413년(태종 13) 지방 행정 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등장하지 않으며, 인주(仁州)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군현제의 정비는 고려 시대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속현의 주현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조선 초기에도 완벽한 군현제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전국의 군현 모두에 수령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는 중앙 집권적인 체제로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군현의 등급도 지방 세력권을 감안했던 고려 때와는 달리 지역의 역사와 호구(戶口) 및 전결(田結)의 수에 따라 재조정된 것이다. 그리고 주(州)라는 이름이 붙은 도호부 이하 군현 명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하도록 하였다. 이때 주 자(字)가 붙은 군현의 명칭이 천 자로 바뀐 곳이 36곳이고, 산 자로 바뀐 곳이 23곳이다. 모두 합쳐 59개 군현의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인주가 인천이 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인천은 1392년(태조 원년) 경원부에서 인주로 강등되었다가 1404년(태종 13)년에 인천군이 되었다. 그러다가 1459년(세조 5) 세조의 비(妃)인 자성 왕비 윤씨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688년(숙종 14)에는 양주를 무대로 한 승려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승려 이(怡)가 인천 출신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 후에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또, 1812년(순조 12)에 반역이 있어 한 차례 더 강등되었다가 10년 뒤에 복구되었다.

군사적으로 인천도호부는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수원진관 아래에 인천과 부평(富平)이 모두 편제되어 있었는데, 강화도에 진무영이 설치됨에 따라 처음에는 인천, 다음에는 부평이 그 전영(前營)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구와 성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기록에 따르면 인천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산(安山)까지 45리, 서쪽과 남쪽은 바다인데 모두 7리, 북쪽으로 부평까지 10리가 된다. 호수(戶數)는 357호(이포의 4호도 합한 수이다), 인구는 1,412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 1명과 선군(船軍) 172명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인천의 토박이 성씨는 이(李)·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의 여섯인데, 내성(來姓)이 박(朴)이며 없어진 내성[亡來姓]은 최(崔)씨이다.

[산업 및 특산물]

또한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었으며, 기후가 바다에 가까워서 일찍 따뜻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간전(墾田)이 2,601결(結)로 이 가운데 논이 3/7이었고,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기장·콩·보리·팥·메밀·참깨·뽕나무·삼[麻]이었다. 약재(藥材)는 사자발쑥·삿갓나물[皀休]·흰바곳[白附子]이었다. 어량(魚梁)은 19곳이 있었는데, 주로 참치가 나며 이 밖에도 오징어·농어·갈치·홍어·넙치[廣魚]·설치[舌大魚]·송어[蘇魚]·조기·망어(亡魚)·상어[沙魚]·숭어[首魚]·민어·가물치[加火魚]·도미·큰새우·대합조개[生蛤]·모시조개[黃蛤]·낙지·소라가 났었다. 염소(鹽所)는 여섯 곳에 있었다.

[교통과 통신]

남산 석성(南山石城)은 군(郡) 남쪽 2리 거리에 있었다. 둘레가 160보인데 사면(四面)이 높고 험했으며, 안에 작은 샘이 있었다. 역(驛)은 중림(重林)과 경신(慶新)이 있었다. 봉화가 성산(城山)에 하나 있었는데 이는 군(郡) 남쪽이었다. 이 봉화는 남쪽으로 안산 옷애[五叱哀]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 싸리곶이[杻串]에 응한다. 큰 방죽이 하나 군(郡) 북쪽에 있었는데, 둘레가 2,600척(尺)이며 이로부터 물을 대는 논이 110결이었다.

조선 후기 인천도호부는 부태면, 조동면, 신현면, 전반면, 황등천면, 남촌면, 원우이면, 다소면, 주안면, 이포면의 10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883년 인천이 개항이 되면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의 기능이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항장으로 이동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도 개항장이 인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인천이라고 하면 개항장을 떠올리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도호부가 있던 문학동 인근 지역을 원인천(原仁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개항 이후 인천이라고 하면 개항장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전통 시대 인천이라고 하면 원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