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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51
한자 金致仁
이칭/별칭 공서(公恕),고정(古亭),헌숙(憲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풍(淸風)
대표관직 개성 유수|대사간|이조 판서|호조 판서|형조 판서|좌의정|영의정
출생 시기/일시 1716년연표보기 - 김치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38년 - 김치인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48년 - 김치인 춘당대 문과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52년 - 김치인 승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762년연표보기 - 김치인 이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65년연표보기 - 김치인 우의정 겸 내의원도제조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66년연표보기 - 김치인 좌의정과 영의정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김치인 직산현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77년연표보기 - 김치인 『명의록』 편찬 주관
활동 시기/일시 1785년연표보기 - 김치인 『대전통편』 편찬 주관
활동 시기/일시 1786년연표보기 - 김치인 영의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김치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정조가 김치인 묘에 승지를 보내 제사 지냄
거주|이주지 거주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운영동
거주|이주지 은거지 -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유배|이배지 유배지 - 충청남도 천안시
묘소|단소 묘소 -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 360-6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 지역으로 이거하여 정착해서 활동했던 문신.

[개설]

18세기 중반부터 인천 소래산(蘇來山) 일대에 세거하던 명문 사족 청풍 김씨(淸風 金氏) 가문 출신으로 3대가 연이어 정승을 역임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공서(公恕), 호는 고정(古亭), 시호는 헌숙(憲肅)이다. 동부승지 김징(金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김구(金構),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부사 심징(沈澂)의 딸이다. 김치인은 3남 중 둘째로 인천 부사(仁川府使)와 장악원 정(掌樂院正), 제조를 역임한 김치일(金致一), 통덕랑(通德郞) 김치언(金致彦)과 동기간이다. 부인은 모두 세 명인데, 첫 부인은 좌의정을 역임한 이관명(李觀命)의 딸로 완산 이씨이고, 둘째 부인은 달성 서씨, 셋째 부인은 광주 이씨이다. 1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여 양자를 삼아 가계를 이었다.

[활동 사항]

김치인(金致仁)[1716~1790]은 1738년(영조 14)에 23세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748년(영조 24)에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전적(藝文館典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문경 어사(聞慶御使)로 문경 현감의 부정을 고발하였다. 이어 지평·문학을 지내고, 1750년에는 호남 어사로 활약하였다. 1752년 승지에 오르고, 이어 대사간, 비변사 부제조, 대사성, 부제학, 이조 참판, 개성 유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47세가 되던 1762년 이후 이조 판서를 시작으로 호조 판서, 형조 판서를 지내고, 1765년 우의정에 올라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목에 따라 직산현(稷山縣)으로 유배길을 떠나기도 했지만 반년 만에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올랐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다시 영중추부사를 거쳐 봉조하가 되었고, 1786년 영의정으로 기용되어 정조의 의중에 따라 당쟁의 조정에 힘을 쏟다가, 1790년 7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8세기 중반에 김재로 계열이 인천 소래산에 선영을 조성하면서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1777년(정조 1) 정조의 명으로 김치인 등은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한 일’을 기록한 『명의록(明義錄)』을 간행하였다. 또, 조선시대 왕실 인물들에 대한 공식 기록물들을 모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편집에도 관여하였다. 1785년(정조 9)에는 다시 왕명으로 김치인이 총재(總裁)로 임명되어 『경국대전』과 『속대전』, 그 이후 임금이 내린 교명(敎命)과 현행법을 정리한 『대전통편(大典通編)』 편찬을 주관하였다.

[묘소]

묘소는 김치인이 당대에 은거하여 별서(別墅)를 조성하였던 경기도 시흥시 안현동[한말 인천군 전반면(田反面)]에 있는데, 현재 시흥시 향토 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 이씨·달성 서씨·광주 이씨의 세 부인과의 합장묘로 첫 부인 완산 이씨는 묘 오른쪽에, 달성 서씨와 광주 이씨는 묘 왼쪽에 각각 합장되었다. 묘역은 둘레돌을 두른 봉분을 중심으로 왼쪽에 묘갈이 있고,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석양(石洋) 한 쌍이 서 있다. 정조 대에 이르러 문인석을 없애고 석양을 설치하는 묘제의 변화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김치인의 묘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갈은 1790년(정조 14) 5월 20일에 세운 것으로 비신은 높이가 1.61m, 폭 68㎝, 두께 37㎝이며 비문은 이조 판서 조돈(趙暾)이 짓고 아울러 글씨를 썼으며, 전면 글씨는 김치인의 형 김치일의 아들 김종순(金鍾純)이 썼다. 또 지문(誌文)은 종형(從兄) 김치만(金致萬)의 아들 김종수(金鍾秀)가 썼다.

일설에 의하면 신도비는 묘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묘역 내에 있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이 반출해 갔다고 전한다. 또, 99칸 규모의 재실과 연못은 가문의 쇠퇴에 따른 관리 소홀로 그 흔적조차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797년(정조 21) 정조의 10차 원행 시 어가가 인천 경내를 지날 때 김치인 묘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특히 시장(諡狀)이 마련되지 못한 김치인에 대해서 홍문관으로 하여금 조속히 시행케 하여 이후 그에게 헌숙(憲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울러 김치인은 할아버지·아버지와 함께 3대가 정승에 오른 것으로 유명한데, 김치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조 판서 조돈은 묘갈명에 “김구는 경국제세(經國齊世)하였고, 김재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으며, 김치인은 청아(淸雅)함을 지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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