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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70
한자 正祖
이칭/별칭 이산(李祘)│형운(亨運)│홍재(弘齋)│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별
본관 전주(全州)
출생 시기/일시 1752년 음력 9월22일연표보기 - 정조 출생
혼인 시기/일시 1762년 음력 2월2일 - 정조와 청원 부원군 김시묵의 딸 혼인
활동 시기/일시 1783년 - 정조 인천 지역을 진휼
활동 시기/일시 1787년 - 정조 인천 지역을 진휼
몰년 시기/일시 1800년연표보기 - 정조 사망
출생지 창경궁 경춘전(景春殿)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1
외가|처가 평동 - 서울특별시 서대문 밖 평동[옛 거평동]
묘소|단소 건릉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관아에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걸어 놓도록 했던 임금.

[가계]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 세자[사도 세자]와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2년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 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으며, 후궁으로는 의빈 성씨(宜嬪 成氏)[1753~1786], 현목수비 박씨(顯穆綏妃 朴氏)[1770~1822], 원빈 홍씨(元嬪 洪氏)[1766~1779], 화빈 윤씨(和嬪 尹氏)[1765~1824] 등을 두었다.

[활동 사항]

정조(正祖)[1752~1800]는 과거 제도를 개선하고, 전제(田制)를 개혁하였으며,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 기구로 삼았다.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정조는 당일 조회에서 자신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 천명하며, 종통은 효장 세자를 잇는 것이지만 사도 세자 역시 국왕의 생부로 존중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사도 세자에 대한 복권 작업을 실시한다.

이에 사도 세자의 존호를 장헌 세자로 높이는가 하면, 생모 역시 혜빈궁(惠嬪宮)에서 혜경궁(惠慶宮)으로 고쳐 부르고, 혜경궁의 조정 문안을 중궁보다 앞서게 하였다. 또한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위치한 사도 세자의 묘인 수은묘(垂恩墓)의 명칭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으며,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그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에는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묘를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태안읍(台安邑) 안녕리(安寧里)로 이장하였으며, 1789년(정조 13) 원호(園號)를 현륭원이라 하였다.

이장과 동시에 경기도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하였는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 행궁, 안양 행궁, 사근참 행궁, 시흥 행궁, 안산 행궁, 화성 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정조가 인천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 역시 이들 행궁으로 행행하는 도중이었던 것 같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의하면 1797년 8월 어가(御駕)가 인천을 거쳐 안양 행궁에 이르게 되었는데, 당시 경내를 지나갈 때에 영의정 하연(河演)의 묘에 치제하도록 명한 바 있다고 한다. 또한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에는 왕이 인천을 지나가는 도중 시를 읊어 인천 관아에 걸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인천 관아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번지]에 있었던 인천도호부 관아를 말하는데, 당시 수령 황운조는 이를 8월에 써서 동헌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같은 해 황운조는 가자(加資)되었다.

[저술 및 작품]

학문에 조예가 유학의 각 경전에 두루 통달하였고, 무예뿐만 아니라 서예 및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재임 기간 동안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였는데, 『증보 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문원보불(文苑輔黻)』, 『동문휘고(同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오륜 행실(五倫行實)』, 『홍재전서(弘齋全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림으로는 ‘필국화도’와 ‘매화도’가 남아 있다.

한편 『인천부 읍지』의 의한다면 “인천을 지나다가 도중에 읊고서 인천 관아에 걸도록 명하였다.”라고 하는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깃발을 펄럭이며 바닷가로 돌아드니/ 소래산의 수려한 빛 눈이 번쩍 열리도다/ 드높은 군자봉 바로 앞에 솟았으니/ 혹여 그 안쪽에 숨은 인재가 있으려나(風旅擸擸海門廻/ 秀色蘇來眼忽開/ 君子峯高入指點/ 儻非中有陰淪才)

[묘소]

정조의 능은 건릉(健陵)으로 본래는 그의 유지에 따라 아버지 장헌 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1821년 효의 왕후가 승하하면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조순의 건의에 따라 천장되어 효의 왕후와 함께 합장된다. 현재 건릉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묘호는 정종(正宗)이며,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다.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고,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가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4 문화재 명칭 변경으로 인한 현행화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도호부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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