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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25
한자 李衡祥
이칭/별칭 중옥(仲玉),병와(甁窩),순옹(順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상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주(全州)
대표관직|경력 성주 목사|경주 부윤|동래 부사|제주 목사
출생 시기/일시 1653년연표보기 - 이형상 출생
몰년 시기/일시 1733년연표보기 - 이형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35년연표보기 - 이형상 성남 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829년연표보기 - 이형상 영혜사에 배향
출생지 인천 죽수리 소암촌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거주|이주지 인천 죽수리 소암촌 추정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사당|배향지 성남 서원 - 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
사당|배향지 영혜사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 1동 1421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에서 태어난 문신.

[가계]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이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사민(李師閔), 할아버지는 이장형(李長馨)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주하(李柱夏)이다.

[활동 사항]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1653년(효종 4)에 인천 죽수리 소암촌(仁川 竹藪里 疎巖村)[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석바위 또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소암 마을로 추정]에서 태어났다. 이형상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25세인 1677년(숙종 3) 사마시(司馬試)[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28세인 1680년(숙종 6)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벼슬길]를 시작하였다. 이형상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호조 좌랑(戶曹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병조 좌랑(兵曹佐郞) 등 내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성주 목사(星州牧使), 청주 목사(淸州牧使), 동래 부사(東萊府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제주 목사(濟州牧使) 등 외직에서 수행하였다.

이형상은 경주 부윤으로 재직 중 상관과의 마찰로 1700년(숙종 26)에 사직한 후 경상북도 영천에서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형상은 30여 년간의 은거 생활 중 제주 목사와 영광 군수를 잠시 역임하였으며, 제수 받은 경원 부사, 장단 부사, 호조 참의 등의 관직을 모두 사직하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형상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발하자 경상도(慶尙道) 소모사(召募使)[조선 시대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로 파견하던 벼슬]가 되어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적당과 내통한다는 노론의 모함을 받아 76세의 고령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鞠問)을 받았으나 곧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이형상은 고문에 의한 후유증과 선의 대비 국상이 겹쳐 영천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1733년(영조 9) 81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마지막 생의 5년을 인천에서 보냈다.

[학문과 저술]

이형상은 『병와집(甁窩集)』 18권, 『소성 속록(邵城續錄)』, 『강도지(江都志)』 등 142종 326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형상의 유품과 저서는 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의 전주 이씨 종중과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주 이씨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품은 초고본 200여 권을 비롯하여 인장(印章) 23과(顆), 호패 9점, 거문고 1점, 홀(笏) 1점, 옥피리 1점, 칼 2점, 표주박 2점, 벼루 1점, 추구통(推句筒) 1점, 화살 9점, 갓끈 5점, 관자(貫子) 4점 등으로 중요 민속 문화재 제119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중 10종의 유집(遺集)이 보물 제652호로 지정되었다.

인천광역시립 박물관에는 6종 8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이형상이 양주 목사로 재직할 때 파직되어 42세[1694년]에 강화도에 2년간 거주하면서 저술한 일종의 읍지(邑誌)인 『강도지』 2책이 있다. 『강도지』는 병자호란 후 요충지 강화도의 수어 방략에 중점을 두어 숙종에게 올린 책으로 강화도의 국방상 중요성을 인식하고 침입을 막는 방법과 계략까지 포함하여 강화 관련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 이 외에도 이형상이 동래 부사 재임 기간 중 부산의 동래부를 통하여 이루어진 차왜(差倭)[조선 시대에 일본에서 조선에 보내던 사신]와 통신사(通信使)[조선 시대에 일본으로 보내던 사신] 등 일본과의 교류에 대한 제반 사항을 기록한 책인 『접왜식례(接倭式例)』와 경주 부윤 재임 시[1699~1700] 관아에서의 향연 절차를 기록한 책인 『동도 향음례(東都鄕飮禮)』, 이형상의 가계·인맥·학맥을 기록한 『선세사우친지록(先世師友親知錄)』, 이형상의 글과 간찰을 모아 후손이 간행한 『병와집(甁窩集)』 2책, 『산중 회화록(山中會話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형상은 1735년 경상북도 영천의 성남 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올랐으며, 1829년(순조 29) 제주 유생들에 의해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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