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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43
한자 地域-年齡-仁川-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희

[텀벙텀벙 버린 생선 ‘물텀벙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먹을거리는 단연 ‘물텀벙이’다. 용현 사거리에서 인하 대학교 방면으로 가는 초입에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지정한 특색 음식 거리 용현동물텀벙이 거리’가 있다. 바다가 없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물텀벙이 거리가 있다는 게 의아한 일이기는 해도 물텀벙이는 한국 관광 공사가 추천하는 대표적인 지역 먹을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텀벙이’란 하도 못 나서 어부들이 그물에 걸려들며 물에 ‘텀벙’ 버렸다고 해 이름 붙인 어류다. 꼼치나 삼세기, 도치 등도 물텀벙이라고 부르지만, 주로 ‘아귀’를 가리킨다. 아귀는 다소 깊은 바다에서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남해와 서해에서 주로 잡힌다. 아귀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위도 커서, 배를 가르면 내장의 절반이 위이다. 큰 입과 위를 가지고 있으니 소화력이 매우 강하다. 조기, 병어, 도미, 오징어, 새우 등을 통째로 삼켜서 녹여 소화한다. 아귀를 잡아 위에서 채 소화하지 못한 생선을 꺼내 팔면 아귀 값보다 더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들 생선을 어부들이 버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장난으로 ‘물텀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잡아 올린 단백질 덩어리를 던져 버릴 정도로 우리 어부 조상들은 여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먹고 죽지 않으면 다 먹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선 시대 101종의 어류를 소개한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아귀를 다루고 있는데, 어부들이 이를 오래 전부터 즐겨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물텀벙이라는 이름은 음식으로 해 먹는 아귀를 처음 접한 사람들이 별칭을 붙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아귀는 한 마리에서 실로 다양한 맛이 나는 생선이다. 크게 나누자면, 살과 껍질, 내장의 맛이 제각각이어서, 골라 먹는 재미도 있다. 탕으로 끓였을 경우, 살은 보들보들하고 껍질은 진득하며 내장은 쫄깃하다. 또 살은 달콤하고 껍질은 밋밋하며 내장은 심심하다. 내장의 대부분은 위인데, 생선의 내장이라기보다는 포유류의 내장을 씹는 듯한 느낌이 든다. 껍질은 부위마다 맛이 다 다른데, 특히 잇몸 주변 부위의 질감은 그 찰기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탄력이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아귀를 부위별로 세세하게 나누고 그 부위별로 특징적인 맛에 어울리게 조리하여 코스 정찬으로 즐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마리를 부위 가리지 않고 통째로 절단하여 탕을 하거나 찜으로 해서 먹는다. 탕과 찜 안의 아귀는 부위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는데, 아귀의 부위별 맛을 즐기려면 퍼즐 조각 맞추듯이 이리저리 훑어보며 먹어야 한다. 아귀를 조리하는 두 민족 간의 이 극단적인 차이점이 두 민족의 음식 문화 차이를 이해하는 데 큰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찜과 탕은 지역적으로 분리되어 발달하였는데, 지금은 경상남도 창원시가 된 마산에서는 찜, 인천광역시에서는 탕이 유명하다. 마산의 찜은 아귀를 말려 쓰는 것이 일반적이며 인천광역시의 탕은 생 아귀를 쓴다. 마산에서는 ‘아구찜’이라 부르고 인천광역시에서는 탕을 ‘물텀벙이’라 했지만, 찜이 번지면서 물텀벙탕, 물텀벙찜으로 분리해서 말한다.

인천광역시의 아귀 요리 식당은 6·25 전쟁 후 인천항 부근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항은 서해의 수산물이 모이는 장소이며, 또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아귀는 대체로 싼 생선이고, 이를 이용해 얼큰한 탕을 끓여 술안주나 끼니 거리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기에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인천광역시의 물텀벙이가 다른 지역에도 크게 소문이 나 지금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물텀벙이 거리’가 조성되어 있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인천항 인근에서는 탕으로 즐겨 먹었지만, 지금은 찜으로도 아귀를 즐긴다. 물텀벙이 거리에서도 탕과 찜 둘 다 맛볼 수 있다.

[국민 먹을거리 쫄면, 이게 진짜다]

인천광역시에는 최초 음식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쫄면이다. 자장면과 함께 국민 먹을거리 반열에 오른 쫄면의 시발지는 인천광역시 중구이지만, 면발만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시작됐다.

쫄깃쫄깃하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진 쫄면의 역사는 불과 40년이 채 안 된다.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의 분식점인 ‘맛나당’에서 만들어 판 것이 시초이고, 당시 주방장으로 일했던 노승희가 쫄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맛나당에 면을 공급하던 광신 제면에서 냉면을 뽑는 사출기의 체[구멍]을 잘못 끼워서 쫄면이 탄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가 하면 쫄면의 탄생과 관련해 다른 주장도 있다. 1970년 3월경,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삼성 식품 공업사로 1호 면류 제조업 면허를 낸 정돈시는 쫄면에 사용하는 면발은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에서 이미 1960년대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돈시는 1965년경 밀가루의 일종인 소맥분 도매업을 경영하면서 당시 자장면용 면발을 생산하던 필 씨라는 화교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정돈시는 당시 사정에 대해 정확하게 구술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필 씨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의 공장을 정돈시가 인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돈시는 공화춘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공화춘은 손님이 많으면 수타면을 다 낼 수 없어서 기계면을 일부 쓰고 있었다. 이 기계면이 바로 쫄면의 원조라는 것이다. 수타면은 오래 두면 불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는 대신, 정돈시가 납품한 국수는 그렇지 않았다. 냉면을 뽑는 사출기에 쫄면 두께의 체를 끼워 생산한 것인데, 다른 첨가물이 없어도 열에 의해서 면이 쫄깃해진다.

정돈시는 그러나 공화춘만으로는 수치타산이 맞지 않아 공장과 학교, 관공서 등의 구내식당에 우동·자장면 국수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당시 분식은 호황을 이루고 있었다. 분식집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식량 정책 때문이다. 춥고 배고팠던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우리 식량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쌀과 보리의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 1969년 미곡 소비 억제를 위한 행정 명령 고시를 시행했다. 첫째 모든 음식 판매 업소는 25% 이상 보리쌀을 혼식을 하고, 둘째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쌀을 원료로 한 음식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어찌됐든 정돈시는 맛나당에도 같은 종류의 면을 공급하면서 우동이나 자장면으로 만들어 팔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 면이 너무 질겨 여학생들은 ‘고무줄 국수’라고 부르는 등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이를 ‘쫄면’이라는 이름으로 고치고, 자극성 있는 몹시 매운 양념을 개발해 내놓으니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학생들이 매운 맛을 이기려고 꼭 아이스크림을 먹어 분식집은 일석이조로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이후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의 신포 우리 만두 박기남 회장이 쫄면을 메뉴에 추가한 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됐고, 결국 인천광역시를 넘어 국민음식이 됐다. 또한 쫄면은 지난 2002년 일본 도쿄 신주쿠의 한 백화점에서 열린 ‘월드컵맞이 한국 대표 음식’으로 꼽히기도 했다.

쫄면 은 인천광역시가 원조다. 하지만 쫄면 탄생에 얽인 설화가 광신 제면이 맞는지, 정돈시의 주장대로 삼성 식품 공업사가 맞는지 여부는 잘 갈무리해야 할 부분이다.

[배고픈 학생들의 한 끼 식사, 계란빵]

1920년대 조선에 들어오는 중국인이 늘어나면서 새로 조선에 들어오는 중국인들을 위한 값싼 음식이 필요했다. 이때 값이 싸고 쉽게 상하지도 않으면서도 팔기에 좋은 음식으로 호떡이 사랑받았다. 호떡은 종류가 다양한데, 호떡 하면 바로 연상하는 당화소, 지금은 계란빵으로 알려진 계단병, 지마, 절화병 등이 있다.

한편 지금의 계란빵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만들어져 193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도미빵에서 기원한다. 도미빵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붕어빵으로 이름과 모양이 바뀌었는데, 이 붕어빵이 인하 대학교 후문에서 배고픈 학생들을 한 또 다른 형태의 식사 대용품인 계란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984년 11월 처음 100원에 판매가 시작되었던 계란빵은 현재 개당 500원에 판매 중인데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을 위한 주인장의 따뜻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인하 대학교 후문의 계란빵이 1984년 이후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면서 이 계란빵을 흉내 낸 가게들이 몇 군데 업소나 생겨나고 없어졌지만 이곳은 변함없이 사랑받으며 인천광역시의 독특한 먹을거리에서 더 나아가 전국적인 즉석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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