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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852
한자 製鹽業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승희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

[개설]

소금은 인간의 생리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영양소를 공급하며,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 맛을 내는 대표적 조미료이다. 소금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소금을 생산·유통·소비하는 인간의 활동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은 해수(海水)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은 자염(煮鹽)과 천일염(天日鹽)이 있다. 자염은 화염(火鹽)·전오염(煎熬鹽)·육염(陸鹽) 등으로 부르며,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뒤 끊여서 석출시키는 소금이다. 천일염은 태양염·청염(淸鹽) 등으로도 부르며, 해수를 유입시킨 뒤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결정(結晶)한 소금이다.

서해안 지역은 오래전부터 자염 생산이 매우 성행하였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크고, 넓은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어 서해안 일대가 제방이 없는 무제염전식(無堤鹽田式) 제염법으로 소금을 생산하였다. 천일염전은 구한말 일제의 염업 정책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재원 확보에 주력하면서 경기도 및 평안남도 등 서해안에 대단위로 염전을 구축하였다. 민간이 생산하는 자염은 값싼 청염의 경쟁 속에 방치시키고 자염의 통제 정책을 지속시켜 갔다.

[변천]

한말(韓末) 원(原) 주안면의 대부분 지역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해당하며, 1898년 경인 철도가 생길 때 인천부 다소면(多所面) 충훈리(忠勳里)[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에 역사(驛舍)를 지으면서 그 이름을 ‘주안역’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1907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이 일대에 천일제염전 시험장이 축조되었다.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천일염전을 확장하였는데, 그 명칭을 주안 염전(朱安鹽田)이라고 불렀다. 1907~1911년 사이에 주안면 간석지에 조성된 87만 2727.273㎡ 규모의 주안 염전은 당시 인천부 주안면 간석동과 십정동에 포함되었지만, 현재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 4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 5동,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 1동,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 3동의 일부를 포괄하는 행정 구역에 해당한다.

인천 지역의 자염에 관한 기록은 1907년 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에서 조사한 내용을 간행한 『한국 염업 조사 보고서(韓國鹽業調査報告書)』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인천군의 자염 생산 지역은 남촌면, 서면, 조동면, 부내면, 신현면, 주안면, 부평군의 경우 석곶면, 모월곶면으로 나온다. 대한제국의 노력에도 인천 지역의 자염식 제염장은 큰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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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중국에서 들어온 값싼 수입염을 다시 제조하는 재제염(再製鹽)이 크게 부흥하였다. 한편 일제의 주도 하에 인천에는 신제염법이 도입되었다. 주안의 천일제염 시험장 설치는 4부 대신이 직접 시찰할 정도로 중요한 정부 시책이었다.

천일제염을 시험하기 위하여 1907년 2월 21일 인천부 주안면 간석지에 염업 시험장을 개설한다는 표식이 세워졌다. 1907년 5월 11일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와 동래부 석남면 용호리에 일본식 전오염 시험장을 우선 개시하였고, 1907년 8월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9,917.355㎡[1정보] 면적의 천일제염 시험장이 완공되었다. 1908년 정부는 주안 시험장을 19만 8347.107㎡[20정보]의 대염전으로 확장하는 계획을 세워 공사에 들어갔고, 시험장은 약 1년 6개월간 운영되다가 1909년 2월에 폐지되어 주안 염전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염업 시험 결과 주안의 천일염 품질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안 천일염의 품질은 일본 전오염의 1등급에서 2등급에 상당하였으며, 중국과 대만의 천일염에 비하여 양호하였다.

이후 일제는 천일염전의 축조 계획을 총 4기[제1기: 1909~1914, 제2기: 1918~1920, 제3기: 1920~1924]로 세워서 진행하였다. 제1기부터 제3기까지 인천 일대의 천일염전 축조 상황을 보면, 제1기는 98만 1818.182㎡[99정보], 제2기는 137만 8512.4㎡[139정보], 제3기는 867만 7685.95㎡[875정보]로 천일염전의 축조가 급격히 많아졌다. 또한 일제는 대정 박람회에 주안의 관염(官鹽)을 출품함으로써 총독부의 염정(鹽政)을 선전하고 새로운 소금인 천일염 전파에 주력하였다. 그러다 1924년 이후 갑작스레 천일염전의 축조가 중단된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의 영향으로 인하여 제4기에 해당하는 천일염전 축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일제는 시장에 판매하려는 천일염이 굵고 검은 빛깔을 띠어 조선인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1910년 10월에 천일염 분쇄 공장을 주안 염전에 세웠다. 1910년대 인천․부산에서는 재제염이 크게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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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5년 8·15 광복과 정치적 격변 및 혼란, 그리고 6·25 전쟁을 거치면서 주안 염전 일대는 크게 파괴되었다. 또 1961년 염 전매법이 폐지되고, 1963년 「염 관리법」[현 「소금 산업 진흥법」]과 「대한 염업 주식회사 법」의 제정으로 주안 염전이 민간 회사인 대한 염업 주식회사로 넘어가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주안 염전은 1968년 폐전되고 정부의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그 자리에 대규모 공업 단지 및 주택 단지 조성이 계획되었다. 그 결과 1973년 7월 15일 한국 수출 공단 제5 단지, 일명 주안 5공단이 준공되어 현재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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