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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46
한자 實尾島事件
이칭/별칭 실미도 난동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실미도 부대|중앙정보부|공군2325부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1년 8월 23일 - 실미도 부대원 24명이 실미도 탈출
종결 시기/일시 1971년 8월 23일연표보기 - 실미도 부대원 24명이 수류탄으로 자폭하여 20명 사망 4명 체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3월 10일 - 실미도 부대원 중 생존자 4명에 대한 사형 집행
발생|시작 장소 실미도 -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
종결 장소 유한 양행 앞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6

[정의]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24명이 탈출하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를 지나간 사건.

[개설]

북한의 ‘1·21 사태’가 발생한 후 정부는 대북 대응 조처 방침에 따라 1968년 4월 1일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실미도 부대를 창설한 후 공작원을 모집해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에서 3년 4개월간 훈련을 진행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용현동·숭의 로터리·제물포역·석바위 등을 지나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49-6 유한 양행 앞에서 군경과의 총격전 끝에 20명이 사망하였다. 실미도 대원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의 대북 대응 조처 강구 방침에 따라 중앙 정보부 주도로 1968년 4월 1일 대북 특수 공작을 목적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여 모집되었으며 당시 첩보 수집을 담당하던 공군 2325부대 내에 소속되어 있었다. 실미도 부대원들에 대한 훈련 기간 중 7명의 공작원들이 대부분 살해 또는 유기 치사되어 사망하였다.

[경과]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 24명은 오전 6시경 기간병 24명 중 18명을 살해하고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탈취해 실미도를 탈출하였다. 같은 날 오후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지나던 향도 교통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석바위를 지나던 중 버스 바퀴가 펑크나 이곳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고 계속 서울로 향하였다. 오후 2시 15분경 군경 저지선에 막혀 총격전을 벌이다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다수가 사망하고 4명은 생존하여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결과]

실미도를 탈출한 24명의 부대원 중 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해 체포됐다. 체포된 실미도 부대원들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실미도 사건 은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어 가던 시기에 국가가 자행한 인권 유린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35년이 지나서야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을 꾀할 수 있었고,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진실의 일부를 확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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