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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92
한자 韓智源
이칭/별칭 사달(士達)│청련(靑蓮)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淸州)
대표관직 인천도호부 도호부사
출생 시기/일시 1514년연표보기 - 한지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7년 - 한지원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한지원 홍문관 수찬·공조 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8년연표보기 - 한지원 이조 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한지원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한지원 인천 도호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3년 - 한지원 삭탈관직을 당함
활동 시기/일시 1555년 - 한지원 복관됨
몰년 시기/일시 1561년연표보기 - 한지원 사망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관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묘소|단소 한지원의 묘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6-2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사달(士達), 호는 청련(靑蓮)이다. 증조부는 한계희(韓繼禧)이며, 조부(祖父)는 한사신(韓士信)이다. 아버지는 도정 한석(韓碩)이며, 어머니는 윤지준(尹之峻)의 딸이다. 윤박(尹璞)의 딸과 혼인하여, 한술(韓述), 한회(韓懷) 등의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한지원(韓智源)[1514~1561]은 1537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44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신백령(辛百齡) 등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별시에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5년 검열에 임명되었으며, 1546년 정언, 1547년에는 홍문관 수찬, 공조 좌랑 등에 제수되었다.

한편 1545년에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신하를 숙청하였고, 안명세(安名世)가 이에 대한 자세한 전말을 춘추 필법[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春秋)』와 같이 비판적이고 엄정한 필법으로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 방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임금이 집행한 일 중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사관이 정리해서 작성한 기록]를 쓴 바 있었다.

1548년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하려 할 때, 을사년 당시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안명세가 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하였고, 이에 안명세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된 여러 사람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지평, 고리, 정랑, 사간원 헌납 등을 역임하였으며, 1552년 1월 21일 인천도호부 도호부사에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24일 모친상을 당하게 되면서 임지를 떠난다. 11개월간 인천 부사로 부임해 있으면서 정무를 돌보던 인천도호부 관아는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에 있다.

1553년 한지원은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할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권신에게 아부하여 탐학을 일삼았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이 되었다. 이후 1555년 복관되었으며, 1557년 성천 부사, 박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저술]

한지원은 문장에 뛰어나 당대의 문학사(文學士)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삼체집(三體集)』이 있는데, 한지원과 그의 아들인 한술, 한회가 쓴 시문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0.14 문화재 명칭 변경으로 인한 현행화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도호부 관아 주소 수정: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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