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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명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85
한자 河友明
이칭/별칭 연당(蓮塘)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진양(晉陽)
출생 시기/일시 1413년연표보기 - 하우명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44년 - 하우명 사헌부 감찰에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449년연표보기 - 하우명 철원 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3년연표보기 - 하우명 동지중추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하우명 계유정난으로 낙향
활동 시기/일시 1473년 - 하우명 효성으로 포상 받음
몰년 시기/일시 1493년연표보기 - 하우명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73년 - 하우명 정문을 받음
추모 시기/일시 1624년연표보기 - 하우명 합천 신천 서원에 배향
거주|이주지 하우명 거주 -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묘소|단소 하우명의 묘 -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
사당|배향지 신천 서원 -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돈평리

[정의]

조선 전기에 인천도호부에 거주했던 문신으로 시흥을 대표하는 효자.

[개설]

소래산 아래에서 어머니와 거주하며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나라에서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각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호는 연당(蓮塘)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던 하윤원이며, 할아버지는 공조 참의를 지낸 하자종(河自宗)이다. 아버지는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된 영의정 하연(河演)이며, 어머니는 이존성(李存性)의 딸인 성산 이씨이다. 3형제 중 막내로 형제로는 군자감 부정 하효명, 예조 좌랑 하제명이 있다. 개성 판윤 박가권의 딸 순천 박씨(順天朴氏)와 결혼하였으며, 하철석, 하철행, 하철년, 하철원 등 4남 1녀를 두었다.

하우명은 그림 솜씨가 뛰어나, 직접 부모님의 영정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청원의 문효영당(文孝影堂)[일명 타진당(妥眞堂)]에는 1708년(숙종 34)에 하연과 성산 이씨(星山李氏) 부부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 영정은 1467년 하우명이 그린 것을 1641년에 본 따서 그렸고, 이를 다시 경상남도 합천의 타진당에서 1749년(영조 25)에 고쳐 모사(模寫)한 것이다. 현재 영정은 백산 서원(柏山書院) 내의 타진사에 모셔져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활동 사항]

하우명(河友明)[1413~1493]은 영의정 하연의 아들로 아버지가 문종의 스승이었다는 은고(恩顧)로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1444년 사헌부 감찰로 재직할 당시 당직 때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사헌부에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449년에는 철원 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452년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곧바로 동지충추부사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자 하우명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낙향하여, 평생 부모를 봉양하는 데 힘을 다했다. 그 후 벼슬에 뜻이 없어 세조(世祖)가 두 번씩이나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하우명은 아버지 하연이 말년에 치매를 앓았음에도 싫은 내색 없이 보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례를 극진히 하고, 조석으로 제수를 직접 준비하였으며, 거상(居喪)이 끝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묘소[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옆 별장에 들어가 살았다. 본디 하우명의 아버지 하연도 영의정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묘(家廟)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배하고, 돌아가신 부친의 초당을 수리하여 평소 쓰던 기물이나 자리를 조금도 바꾸지 않을 정도의 효자였다고 한다. 부친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더욱 지극하여, 146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하였고, 3년간 시묘를 살면서 하루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묘 옆에 영당(影堂)을 지어 놓고, 직접 부모님을 그린 영정을 모셔 두고, 마치 살아있는 부모를 대하듯 공양하였다. 하우명의 이러한 효성은 고을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1473년에 하우명이 살고 있던 인천부의 지방관이 중앙에 보고함에 나라에서 정려각을 세우고 호역을 면제해 주었다.

하우명이 낙향한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산 곳은 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일대로, 조선 시대에는 인천도호부에 소속된 신현면의 신촌리와 사천리 지역이었다. 하우명의 효성을 조정에 상주한 자는 1470년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 부임한 이삼로(李三老)로 추정된다.

[묘소]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12번지 소래산 중턱 남쪽 자락에 묘가 있다. 하연하우명의 묘 및 그 재실인 소산 서원이 위치해 있다. 하우명의 묘는 부인인 순천 박씨의 묘와 나란히 만들었다. 묘소를 중심으로 중앙에는 향로석 및 상석이 놓여 있으며, 그 앞에 장명등과 문신석인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봉분 앞에는 묘표(墓表)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송소용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편, 하우명 효자정각은 맞배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이고, 그 안의 정려비(旌閭碑)는 높이 1.27m, 폭 61㎝, 두께 22㎝의 규모이다. 이 비각은 1700년대에 세워진 후, 수차례 중수를 실시했다.

[상훈과 추모]

1473년에 하우명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복호(復戶)를 내렸다. 또한 1624년에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돈평리 신천 서원(新川書院)에 배향되었는데, 하우명 정려비(旌閭碑)의 비문은 부사 최흔(崔昕)이 지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6.03 [정의] 수정 <변경 전> 조선 전기에 인천도호부에 거주했던 문신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효자. <변경 후> 조선 전기에 인천도호부에 거주했던 문신으로 시흥을 대표하는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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