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79
한자 趙正萬
이칭/별칭 정이(定而)│오재(寤齋)│효정(孝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경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임천(林川)
대표관직 호조 판서
출생 시기/일시 1656년연표보기 - 조정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81년 - 조정만 식년시 식년진사 장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조정만 의금부 도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99년연표보기 - 조정만 강서 현령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05년연표보기 - 조정만 공조 정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05년연표보기 - 조정만 평양 서윤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07년연표보기 - 조정만 광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10년연표보기 - 조정만 나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13년연표보기 - 조정만 성천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14년연표보기 - 조정만 능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18년연표보기 - 조정만 안악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조정만 상주 목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22년연표보기 - 조정만 신임사화로 벽동에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24년 - 조정만 영변부로 양이
활동 시기/일시 1725년 - 조정만 사면
활동 시기/일시 1726년연표보기 - 조정만 수원 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 조정만 충청 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조정만 호조 참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조정만 동의금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5년연표보기 - 조정만 공조 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조정만 판윤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7년연표보기 - 조정만 형조 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39년연표보기 - 조정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48년 - 조정만 효정 시호를 받음
유배|이배지 조정만 유배 - 평안북도 벽동군
유배|이배지 조정만 이배 - 영변부
묘소|단소 조정만 묘소 -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산 46-3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를 세거지로 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이며,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합천 군수 조경망(趙景望)과 유식(柳寔)의 딸 진주 유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조정우(趙正宇), 조정화(趙正華), 조정하(朝正夏) 등이 있다. 아들로는 조명두(趙明斗), 조명익(趙命翼), 조명규(趙明奎), 조명기(趙明箕)가 있다. 첫 부인 풍산 홍씨는 참의(參議) 홍주국(洪柱國)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는 서령(署令) 이진명(李晉命)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의 문인이다.

[활동 사항]

조정만(趙正萬)[1656~1739]은 1681년(숙종 7) 식년시(式年試)에 식년진사 일등으로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84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윤증송시열을 배반한 사실을 비난하며 유생들을 모아 상소를 올린 바 있으며, 1688년 인현 왕후 폐출 사건 때에 파직 당하였다가, 1694년 인현 왕후가 복위되면서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가 된다. 이후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비롯하여 공조와 호조의 낭관(郎官), 제용감(濟用監)과 군자감(軍資監)의 판관(判官), 장악원(掌樂院) 정(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방직으로는 강서 현령을 시작으로 평양 서윤·광산 현감·안악 군수·청송 부사·성천 부사·나주 목사·능주 목사·양주 목사·상주 목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노론이 세자 시절의 경종(景宗)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따라 노론 4대신이 사사(賜死)되고 수백 명의 노론이 탄압을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조정만 또한 이에 연루되어 벽동으로 유배되었다. 1724년 영변부(寧邊府)로 양이(量移)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사면되면서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을 거쳐 군자감 정, 수원 부사, 충청도 관찰사, 호조 참의, 호조 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1734년에는 경연에서 임금에게 ‘알인욕 존천리(遏人慾 存天理)’의 설을 강론하니, 이를 들은 임금이 ‘알욕존리(遏慾存理)’ 네 글자를 써서 올리라 명하고 호피를 특사하였다. 1735년에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한성부 판윤, 공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후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조정만은 효성이 지극하였고, 경(經)·사(史)·백가서(百家書)에 두루 통하였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리고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이희조(李喜朝) 등 문인들과 친교가 깊었다.

조정만이 인천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의 아들 조명익이 파주에 있던 모친의 묏자리가 불길하다고 하여 새롭게 묏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인천의 남촌 일대에 터를 잡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묘 역시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임천 조씨 오제공파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 한편 조정만의 묘역이 위치한 남촌면(南村面)은 1968년에 인천시 남구 남촌동으로 불리다가, 1988년 남구로부터 분구되어 남동구 남촌동[현재의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조정만은 경사백가에 정통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과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그의 저서로는 『오재집(寤齋集)』이 전한다. 이 책은 본래 장손인 조덕수(趙德洙)가 조정만의 유고를 모아 편집해 놓은 것을 후대에 필사한 것으로써, 서문은 없으며 권말에 현손 조기진(趙基晉)이 쓴 후지(後識)가 있다. 현재는 국립 중앙 도서관과 서울 대학교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1703년 조원(趙瑗)·조희일(趙希逸)·조석형(趙錫馨) 등 삼세(三世)의 글을 묶어 『가림세고(嘉林世稿)』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여류 시인 숙원 이씨의 시집 『옥봉집(玉峯集)』 발문을 그녀의 후손인 조정만이 지었다고 한다.

[묘소]

조정만의 묘는 시 지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인천광역시 남동구 도림동 산 46-3번지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역에는 사성(莎城)[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싼 토성]이 있으며, 묘비와 더불어 망주석·문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또한 근처에는 높이 3.5m이고 너비가 1m인, 이의현(李宜顯)이 찬하고 김진상(金鎭商)이 쓴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정만은 1748년(영조 24)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