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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60
한자 鄭眉壽
이칭/별칭 기수(耆叟),우재(愚齋),소평(昭平),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종친|문신
성별
본관 해주
대표관직 인천도호부사|우찬성
출생 시기/일시 1456년연표보기 - 정미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73년 - 정미수 음관으로 출사
활동 시기/일시 1490년연표보기 - 정미수 인천 도호부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12년연표보기 - 정미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12년 - 정미수 소평 시호를 받음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묘소|단소 정미수 무덤 및 신도비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65-1

[정의]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종친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기수(耆叟), 호는 우재(愚齋)이다. 아버지는 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賜死)된 정종(鄭悰)이며, 어머니는 문종(文宗)의 여식 경혜 공주(敬惠 公主)이다. 이덕량(李德良)의 여식 전의 이 씨(全義 李氏)를 처로 맞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활동 사항]

정미수(鄭眉壽)[1456~1512]는 부친이 역모죄로 죽자 경혜 공주와 함께 한양으로 소환되어 세조(世祖)의 그늘에서 자랐고, 잠저에서 성종(成宗)을 모셨다. 1473년(성종 4)에 음관으로 출사하여 돈령부직장, 형조 정랑 등을 역임했는데, 죄인의 자손이 임관되었다고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마다 성종의 비호로 무마되었고, 이어서 선전관, 사헌부 장령, 한성부 서윤 등을 거쳐 1490년(성종 21) 7월에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1494년 1월에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서 상서(上書)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때까지는 재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자 당상관에 올라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고, 그 뒤 충청도 관찰사, 승지, 공조 참판, 지돈령부사, 한성부 판윤, 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504년(연산군 10)에는 의정부 참찬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507년(중종 2)에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났고, 1512년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 65-1번지에 있다. 사릉(思陵) 경내에 있으며, 정경부인 전의 이 씨와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魂遊石), 장대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다. 사릉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정미수 신도비는 1513년에 정미수의 부인이 건립한 것으로 찬자는 강혼(姜渾), 서자는 김희수(金希壽)이다.

[상훈과 추모]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때의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512년 사망 후, 소평(昭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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