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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551
한자 李效元
이칭/별칭 성백(誠伯),장포(長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함평(咸平)
대표관직 인천도호부 부사
출생 시기/일시 1549년연표보기 - 이효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8년~ 1599년연표보기 - 이효원 인천 도호부사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29년연표보기 - 이효원 사망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묘소|단소 이효원 묘소 - 충청남도 청양군
사당|배향지 청양 영모재 -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 장승리 73-1

[정의]

조선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함평(咸平)이고 자는 성백(誠伯), 호는 장포(長浦)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지내고 승지(承旨)에 추증된 이세번(李世蕃)이고, 할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죽주 부사(竹州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이윤실(李允實)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에 추증된 이관(李瓘)이고 어머니는 흥암 수(興巖守) 이귀년(李龜年)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효원(李效元)[1549~1629]은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배척하는 자가 있어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었다가 성환 찰방(成歡察訪)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호조 좌랑(戶曹佐郞), 예조(禮曹) 좌랑으로 옮겼다.

이효원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宣祖)가 관서(關西)[마천령의 서쪽 지방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아버지를 모시고 호가(扈駕)[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뒤따르던 일]하여 가는 도중 병조 낭관(兵曹郎官)을 제수받아 분조(分朝)[임진왜란선조가 본조정(本朝廷)과 별도로 임시로 설치한 조정]에 소속되어 성천(成川)에 있었다. 이효원은 이후 호조 정랑(正郞)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 영변 판관(寧邊判官)을 제수받았다. 이효원은 부모의 상(喪)을 당한 후에 공조와 병조의 정랑(正郞)을 제수받고,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세자시강원 사서(司書),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또 이효원은 외직으로는 1598년 인천 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가 1599년 체직되었고,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기도 하였지만 방백(方伯)[도지사]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이효원은 1606년(선조 39)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되었고, 1608년(선조 41) 정월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다. 선조가 죽은 후 이효원은 거제로 귀양을 갔으나,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귀양에서 풀려나오게 된다. 그 후 이효원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제수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직접 토벌에 참여하였고, 1625년(인조 3)에는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효원은 1629년(인조 7) 정월 1일에 충청남도 청양(靑陽)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효원의 묘소는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으며,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 장승리 73-1에 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재실인 청양 영모재(靑陽永慕齋)[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4호]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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