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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대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98
한자 安平大君
이칭/별칭 청지(淸之),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장소(章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오정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왕족|대군
성별
본관 전주(全州)
출생 시기/일시 1418년연표보기 - 안평 대군 출생
혼인 시기/일시 1429년 - 안평 대군과 좌부대언 정연의 딸 결혼
활동 시기/일시 1428년 - 안평 대군 책봉
추모 시기/일시 1758년 - 안평 대군 장소 시호를 받음
추모 시기/일시 1791년연표보기 - 안평 대군 장릉 배식단에 배향
사당|배향지 장릉 배식단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1090-1]

[정의]

인천의 토성(土姓)인 인천 채씨(仁川蔡氏)와 혼인 관계인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한 왕족.

[개설]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이다. 이름은 용(瑢)이고,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이다.

[가계]

안평 대군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아버지는 세종, 할아버지는 태종, 증조할아버지는 태조이며, 외할아버지는 심온(沈溫)이다.

[활동 사항]

안평 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28년(세종 10) 안평 대군에 봉해졌고, 좌부대언(左副大言) 정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0년(세종 12) 형 수양 대군(首陽大君), 동생 임영 대군(臨瀛大君)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을 쌓았다. 안평 대군은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1438년(세종 20) 왕자들과 함께 야인(野人)을 토벌하였으며 경재소(京在所)[조선 초기에 정부와 지방의 유향소(留鄕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기구]를 설치할 때 회령(會寧)을 맡았다. 권신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문신들과 제휴하여 수양 대군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 행정인 황표 정사(黃票政事)[황표에 의해 임금이 형식적으로 낙점하는 인사 방법]를 장악하여 조정(朝廷)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안평 대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예술과 문한(文翰)에 능력을 발휘하였다. 1441년(세종 23) 수양 대군과 함께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을 감독하였고, 1444년(세종 26)에는 『운회(韻會)』의 번역 관장, 이듬해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감수하였다.

그러나 안평 대군은 1453년 10월 수양 대군 일파의 단종 폐위와 세조의 즉위를 결정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황보인, 김종서 등과 결탁해 수양 대군의 집권 의도를 저지하려 했다는 이유로 강화도로 유배된 후 교동(喬桐)[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으로 옮겨져 8일 만에 36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저술 및 작품]

신숙주의 『보한재집(保閑齋集)』 「화기(畵記)」에 의하면, 안평 대군은 222점이 넘는 서화를 수장하여 이를 바탕으로 자신은 물론 친분이 있는 인물들의 연마에 도움을 주어 당시 예술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할 정도로 서화에 조예가 있었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따르면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여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진필로는 「몽유도원도 발문(夢遊桃源圖 跋文)」[일본 천리 대학(天理大學) 소장], 금석문으로는 세종의 신도비문 등이 전한다. 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의 별업(別業)[별장]이며, 조서강(趙瑞康)의 퇴휴지지(退休之地)인 가정(佳亭)[지금의 인천광역시 서구 소재]의 제영시(題詠詩)를 모아 『석호 가정 별업도(石湖佳亭別業圖)』라는 서화집(書畵集)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밖에 안평 대군의 진필로는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국보 제238호, 개인 소장]이 전하고, 금석문으로는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 「청천 부원군 심온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임영 대군 묘표(臨瀛大君墓表)」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안평 대군은 1747년(영조 23)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復官)되었고, 1758년(영조 34) 장소(章昭)의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 장릉(莊陵)의 배식단(配食壇)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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