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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72
한자 徐相喬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대구(大邱)
대표관직 인천 부윤|감리 인천항 통상사무|봉상사 제조
출생 시기/일시 1838년연표보기 - 서상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2년 - 서상교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97년 12월 31일연표보기 - 서상교 인천 부윤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1월 27일 - 서상교 인천항 재판소 판사 겸임
활동 시기/일시 1899년 7월 4일 - 서상교 인천 부윤 이임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인천 감리서 - 인천광역시 중구 중구 개항로 45번길 21-27[내동 83]

[정의]

조선 말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부의 부윤(府尹)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부여 현감을 역임한 서명순(徐明淳)의 아들로 서기순(徐冀淳)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서상교(徐相喬)[1838~?]는 1838년(헌종 4) 출생하여 1886년(고종 23) 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현대식 학교인 육영 공원(育英公院)이 설치되자 주사(主事)로 있다가 그 뒤 내무부 부주사를 지냈다. 1892년 알성시(謁聖試)[임금이 문묘에 참배한 뒤 실시하던 비정규적인 과거 시험] 병과(丙科) 5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주차 천진 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 가서 근무를 하다가 1894년 상해(上海)에서 김옥균(金玉均)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자 당시 독리 통상 사무(督理通商事務)로서 그 시신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상교는 1896년 장례(掌禮)가 되고, 1897년 12월 31일 인천 부윤으로 부임하여 1899년 7월 4일까지 약 18개월간 복무하였다. 당시 인천 부윤이 감리 인천항 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및 인천항 재판소 판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개항장 인천에서의 내·외국인의 통상·거주·범죄 등과 관련하여 중앙 정부와 왕래한 문서가 현재 많이 남아 있다.

서상교는 이후 교동 군수(喬桐郡守)로 이임했고, 1905년 궁내부[구한말에 왕실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서 시종원[임금의 비서(祕書)·어복(御服)·어물(御物)·진후(診候)·의약·위생 따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부경(侍從院副卿)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그리고 봉상사[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제조(奉常司提調) 등을 거쳐 1910년 정2품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서상교는 교동 군수로 재임하던 1898년 『교동군 읍지(喬桐郡邑誌)』 편찬을 주도했다. 그리고 1884~1898년까지 약 14년간 자신의 관직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술한 『척실기적(摭實記蹟)』이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의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갑신정변 관련 기록인 「군국아문(軍國衙門)」, 단발령에 대한 소감을 기록한 「단발변(斷髮辨)」을 비롯하여 인천 및 영종도, 덕적도 등지에서의 일본인의 경제 침탈 상황을 예시한 부분 등이다. 하지만 내용이 대체로 너무 협소하게 기술되어 있는 까닭에 전반적인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현재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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