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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치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57
한자 閔致久
이칭/별칭 경칙(敬則),효헌(孝獻)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척신(戚臣)
성별
본관 여흥(驪興)
대표관직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출생 시기/일시 1795년연표보기 - 민치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56년연표보기 - 민치구 인천 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57년 - 민치구 인천 부사 이임
몰년 시기/일시 1874년연표보기 - 민치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74년 - 민치구 영의정 추증
추모 시기/일시 1874년 - 민의생 위숙 시호를 받음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척신(戚臣).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칙(敬則).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민단현(閔端顯)이고, 이렴(李燫)의 딸과 혼인하여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를 낳았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장인으로, 고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활동 사항]

민치구(閔致久)[1795~1874]는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연안(延安) 부사(府使), 선혜청(宣惠廳) 낭청(郎廳) 등을 거쳐 1856년 8월 24일 인천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2월 26일까지 약 6개월간 인천 부사를 역임했다. 1863년에 외손자인 고종이 즉위하자 공조 참의가 되었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거쳐 1864년 공조 판서에 특진하였다. 이듬해 광주부(廣州府) 유수(留守)가 되었고, 1867년 청주 목사, 1868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69년 다시 공조 판서를 지냈고, 판돈녕부사로 재임 중이던 1874년에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874년 12월 14일에 민치구가 사망하자 고종은 동원부기(東園副器)[왕실용 관곽(棺槨)]와 함께 돈 1,000냥, 쌀 30석, 무명과 베 각각 5동, 비단 등속 5단(端), 전칠(全漆) 1말을 보냈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12월 17일에는 창경궁(昌慶宮) 금천교(禁川橋)에서 성복일(成服日)의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했고, 효헌(孝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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