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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343
한자 石器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이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유적 서포항 유적 - 함경남도 옹기군 굴포리
유적 석장리 유적 -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유적 전곡리 유적 -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
유적 시도 유적 -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시도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와 간석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를 아울러 가리키는 말.

[개설]

구석기 시대란 인류 문화의 시원부터 시작하여 1만 년 전 무렵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년에 이르는 인류 문화의 원초 단계 시기를 가리킨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동양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 중앙아메리카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이 용어는 원래 톰센(Christian Jürgensen Thomsen)이 삼시대법에서 정의한 석기 시대를 러복(John Lubbock)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눈 것에 유래하였다. 19세기 말에는 두 시기의 중간 단계로서 중석기 시대가 정의되었으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중석기 시대의 문화상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석기 시대]

우리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두만강변 동관진[현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에서 구석기로 보이는 유물이 수습되었지만, 1962년 함경남도 옹기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 하부와 1964년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된 것이 구석기 고고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남한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은 1970년대 말까지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조사는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충주댐 수몰 지구에서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수양개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각지에서 조사가 활발해지며 현재까지 1,000개 정도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다.

다음으로 한반도 신석기 유적을 살펴보면, 최고 연대는 기원전 5000년경의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하층, 부산광역시 동삼동 하층의 예를 들 수 있으며, 가장 늦은 연대는 서기전 1000년경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시도 유적을 들 수 있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규정함에 있어 다른 어떤 종류의 유물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토기이다. 일반적으로 토기의 제작 과정이나 무늬의 종류는 각 지역, 각 시기의 문화나 사회적 배경의 변화를 반영하므로, 신석기 편년 규명에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 유적은 주로 해안 지역에 밀집 분포되어 있으며, 각 지역마다 토기의 양상이 뚜렷이 다르다. 한반도 서해안의 대동강·한강 유역과 인접 도시에서는 뾰족 밑을 기본으로 하는 포탄형의 토기가 지역 전통을 이루고 있으며, 동북 지방의 두만강 유역과 강원도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납작 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 토기가 지역 전통을 이룬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 유역과 해안 지역에는 서해안이나 동해안 지역의 양상과는 달리, 각각 계통을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토기 형식이 혼재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기에 접어들며, 유적의 수와 규모는 급감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청동기 시대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라 짐작된다.

[인천광역시의 석기 시대]

인천광역시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예가 없으나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 일대의 삼목도 Ⅱ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에 형성된 고토양층과 석영제 몸돌[석핵], 긁개류가 발견되었고,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서 찍개,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에서 원형 석영제 몸돌 석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서 석기가 발굴 보고된 예가 있으며, 인천 국제 공항 건설을 계기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 외에도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는들 유적과 삼목도 Ⅰ·Ⅱ 유적,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송산 유적,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백년골, 인천광역시 중구 남북동·북성동,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작약도 패총 등지에서도 신석기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문학 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실시된 문학산 일대의 지표·발굴 조사에서 약간의 토기가 나왔다.

[출토 유물]

문학산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을 살펴보면, 우선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에서는 1점의 토기가 지표 조사에서 나왔다. 몸통 부분에 해당하며, 바탕흙은 점토질로서 빗금무늬가 새겨져 있다. 두께는 1.0㎝ 정도이다.

문학산의 발굴 조사에서는 길게 도랑을 파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은 구상 유구(溝狀遺構)와 둥그런 구덩이를 파서 집을 지은 타원형 수혈 유구(橢圓形竪穴遺構)에서 토기가 나왔다. 구상 유구에서는 4점의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몸통 부분에 해당한다. 바탕흙은 점토질이며, 모래나 운모·장석을 혼입하여 만들었다. 두께는 0.4~0.9㎝이며, 그 중 0.7㎝가 주종을 이룬다. 무늬는 무늬를 새기는 데 쓰던 도구인 무늬 새기개[施文具]를 눌러 찍었다. 타원형 수혈 유구에서는 1점이 출토되었는데, 몸통 부분으로 점토질 바탕흙에 빗금무늬를 새겼다. 이 밖에 각종 석기류 중에서도 돌도끼나 갈돌은 신석기 시대에도 많이 사용되는 유물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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