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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77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손민환

[정의]

일제 강점기 동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

[개설]

1910년 경술국치라 일컫는 한일 병합 조약이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1919년 3·1 운동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학생 주도의 독립운동과 청년 주도의 독립운동, 노동자 주도의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학생운동]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었던 인천 공립 상업 학교[현 인천 고등학교]는 1919년 11월 일어 교과의 폐지를 주장하고, 서울의 각 학교와 함께 동맹 휴학을 강행했다. 또한 1923년 일본인 교사의 자질을 문제 삼아 동맹 휴학을 주도했던 백남칠, 최병한, 이의연, 이상의, 이기봉, 최봉도 등이 퇴학당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무기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929년에도 한 차례 더 동맹 휴학을 실시하여 학생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나갔다.

[청년운동]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점진주의와 급진주의로 갈라졌다. 국내에서는 점진주의가 지배적이었고, 이에 따라 계몽주의적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것이 청년 운동 단체였다. 청년 운동 단체는 각 지역에서 신사상과 독립의 당위성을 전파했다. 이러한 청년 운동 단체의 활약은 인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 중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기반으로 한 단체가 바로 1922년 12월 1일 창립된 소성 청년회다. 소성 청년회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거주하던 청년들에 의해 교의 친목과 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회장은 김창진이었다.

[노동운동]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독립운동은 비단 청년운동과 학생운동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인천광역시 남동구로 분구되기 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속했던 논현동에 전매국 남동 출장소가 있었는데, 1935년 6월 13일 염전 노동자 81명이 동맹 파업을 단행하였다. 염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항하여 동맹 파업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 쟁의를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독립운동은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지역 내에서 행해진 계몽 운동과 연계되어 1930년대에 본격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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