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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47
한자 五三抗爭
이칭/별칭 5·3 인천 사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신한 민주당|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인천 지역 사회 운동 연합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6년 5월 3일연표보기 - 5·3 항쟁 발발
발생|시작 장소 옛 시민 회관 쉼터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지도보기

[정의]

1986년 5월 3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을 비롯한 인천광역시 지역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개설]

1985년 2·12 총선 이후 전개된 직선제 개헌 운동의 열풍을 타고 신한 민주당이 1986년 5월 3일 당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소재 인천 시민 회관에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보수 야당의 기회주의적 속성에 반발한 재야 세력 및 학생 운동세력 등이 독자적인 대회를 열며 시위를 전개, 신한 민주당의 결성 대회가 무산되고 129명이 구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1985년 2·12총선 이후 직선제 개헌 운동이 열기를 더해가면서 1년 후인 1986년 2월 12일, 신한 민주당과 재야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1984년 결성한 민주화 운동 추진 협의회가 1천만 명 개헌 서명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신한 민주당은 부산을 시작으로 전국 시·도 지부별 개헌 추진 위원회 결성 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하고 광주, 대구, 대전, 청주를 거쳐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결성 대회를 갖기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1986년 4월 29일 신한 민주당 이민우 총재, 민주화 운동 추진 협의회 김대중 의장 등이 참석한 민주화를 위한 국민 연락 기구 기자 회견에서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발표되었다. 이에 1986년 4월 30일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이 민주화를 위한 국민 연락 기구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는 등 재야 세력과 학생 운동 세력은 신한 민주당을 기회주의적 보수 야당으로 규정하고, 신한 민주당의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가 개최될 예정인 1986년 5월 3일 인천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 의장이었던 문익환의 ‘기소장’ 요지에 따르면,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 지도부는 1986년 5월 3일 개최될 예정인 신한 민주당 주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에 대처하기 위해 미리 유인물과 책자를 만들어 5월 3일 오전 6시경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1동 소재 천주교 주안 1동 성당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5월 3일 오전 11시경 인천 사회 운동 연합 집행국장 이우재, 편집실장 홍성복 등의 지휘 하에 손수레에 확성기와 마이크, 앰프, 플래카드 등을 설치해 두었다가 5월 3일 정오경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과]

1986년 5월 3일 오후 2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옛 시민 회관 쉼터에 위치했던 인천 시민 회관에서는 신한 민주당 주최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미 당일 오전부터 인천 시민 회관과 주안 사거리는 인파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낮 12시경부터 인하 대학교, 서울 대학교, 고려 대학교, 연세 대학교 등의 학생들과 인천 지역 사회 운동 연합을 비롯한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 등 사회 운동 단체 회원들이 시민, 노동자들과 함께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은 결성 대회장인 인천 시민 회관 앞에서 ‘민주화 촉진 인천 시민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당시 시위 과정에서 나온 구호와 유인물의 주요 내용은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 놈’, ‘민중 정권 수립하자’, ‘인천을 해방구로’, ‘해방 인천 만세’, ‘천만 노동자 해방 투쟁 승리 만세’, ‘철천지 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 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등이었다.

오후 1시경, 시위가 본격화되어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면서 주변 상가가 철시하고 거리는 최루 가스로 뒤덮이게 되었다. 잠시 후인 오후 1시 50분경 신한 민주당 이민우 총재와 김영삼 고문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부 시민들과 함께 주안역 방향으로부터 행진하며 인천 시민 회관 앞까지 도착했으나 시위 군중에게 막혀 대회장에 입장을 하지 못한 채 대회 연기를 발표하고 신한 민주당 인천 중·남구 지구당 사무실로 철수하였다. 신한 민주당은 상황이 호전되는 데로 대회를 재개하려 하였으나 오후 4시 30분경 시위 군중들이 주안역 방향에 있던 경찰차 1대를 탈취하는 등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자 대책 회의를 연 후 오후 5시경 결성 대회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과]

5·3 항쟁으로 인해 129명이 구속되었고, 운동권 세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과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민주화 운동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5·3 항쟁은 1980년 5월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민주화 운동 진영의 반성을 촉발하면서 1년 뒤에 발생한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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