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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방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36
한자 東洋紡織
이칭/별칭 동양 방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업체
전화 032-764-1531
홈페이지 동양 방직(http://www.dong-il.com)
설립 시기/일시 1934년 10월 1일연표보기 - 동양 방직 조업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48년 - 동양 방직 조업이 동양 방적 공사로 개칭
개칭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동양 방직이 동양 방직 주식 회사를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66년 - 동양 방직이 동일 방직 주식 회사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52년 - 동양 방직이 조선 제마의 학익 공장을 불하받음
최초 설립지 동양 방직 - 인천 만석동
현 소재지 동일 방직 인천 공장 - 인천광역시 동구 제물량로 357[만석동 37]

[정의]

일제 강점기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있었던 방직 업체.

[변천]

인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직 공장이었던 동양 방직(東洋紡織)은 1930년대 초에 세워졌으며, 일본에 본사를 두고 경성의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공장을 두었다. 광복이 되고 나서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다가 1948년에 동양 방적 공사로 바뀌었다. 이때 공장장인 서정익이 초대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귀속된 적산 기업의 민영화 방침을 세움에 따라 1955년에는 이사장 서정익이 회사를 인수해 동양 방직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6년에는 회사명을 동일 방직 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양 방직은 일제 강점기의 리얼리즘 소설가 강경애(姜敬愛)[1907~1943]가 자신의 소설 『인간 문제』의 작품 속 배경으로 삼을 정도로 치열한 노동 운동의 현장이었다. 실제로 광복 이후 좌익 계열의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약칭 ‘전평’] 계열이 작업장을 장악하고 이른바 자주 관리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주 관리 운동은 원자재 부족과 경영 미숙 등으로 생산량이 급감하는 등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그러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평안 청년회와 대한 노동조합 총연합회[약칭 ‘대한 노총’]의 힘으로 노동 현장이 안정되고 생산에 집중함으로써 일일 생산량이 옷감 1,000여 필에 이르는 등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였다.

[현황]

6․25 전쟁 직후인 1952년에는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었던 조선 제마의 공장을 흡수하고 염직 시설도 갖추어 거대 방직 공장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동양 방직이 있던 원래 학익동 공장 자리는 학익동이 재개발되어 2010년 엑슬루 타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현재는 없어졌고,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에 동일 방직의 공장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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