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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피습 애도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34
한자 金九被襲哀悼式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애도식
관련인물/단체 김구|정해궁|이기영|한국독립당 인천 특별 당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9년 7월 5일연표보기 - 김구 피습 애도식 거행
발단 시기/일시 1949년 6월 26일 -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습
발생|시작 장소 인천 공설 운동장 -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당시 인천부 도원동]

[정의]

1949년에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김구 주석 애도 행사.

[개설]

1949년 7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의 영결식에 맞추어 당일 오후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당시 인천부 도원동]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김구 주석을 애도한 집회이다.

[역사적 배경]

김구(金九)[1876~ 1949]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이유는 김구와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전개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 때문이었다. 김구는 1948년 1월 26일, 유엔이 ‘한반도의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정한 뒤 한국에 파견한 한국 위원단에 보내는 의견서에서, 한국 문제는 결국 한국인이 해결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미국과 소련 양쪽의 군대가 철퇴하는 대로 즉시 남북 지도자 회의를 소집하여 조국의 완전 독립과 영원한 광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적인 2월 10일에는 ‘3천만 동포’들을 향해 더욱 강한 어조로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라고 호소하였고, 김규식과 함께 북행을 결행, 남북 지도자 회의[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반면 한국 민주당과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단독 정부 수립론자들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에 발 빠르게 대비하면서 정부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구가 반대 세력의 피습으로 사망하였다.

김구가 괴한의 피습으로 사망한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인천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날 일반인의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는데, 당일 오전 10시 30분경 카키복 차림의 청년 3명이 김구 주석이 머물고 있는 경교장(京橋莊)을 찾아 비서실에서 면회를 청했다고 한다. 3명 가운데 1명은 전에도 두 차례 찾아와 안면이 있던 터여서 선우진, 이국봉, 이풍주 등과 환담하다가 선우진이 오후 12시 40분쯤 한 청년[안두희]을 김구 주석이 기거하는 2층으로 안내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10여 분 후에, 경비 경관이 총성이 났다고 하며 2층으로 달려가니 안두희가 권총을 던지고 경관에 체포되었다. 비서진이 거실로 달려갔으나 김구는 네 곳에 관통상을 입었다. 급보로 달려온 적십자 병원 외과 과장과 성모 병원 박병래가 응급 치료를 하였으나 김구는 결국 절명하였다.

[경과]

정부는 국무 회의를 열어 김구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고 재무 장관과 사회부 장관, 보건부 장관을 장례 위원으로 정해 1949년 7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 영결식을 엄수하기로 결정했다. 김구의 급서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1949년 7월 5일 서울 운동장에서 김구의 영결식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식장에는 국무총리 이범석과 각 부 장관, 신익희 국회 의장과 의원 일행, 각 정당·사회단체 간부,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참석하였고 유해는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을 역임한 저명한 민족 지도자 김구를 영원히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은 인천 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거 당일 김구가 이끌던 한국 독립당 인천 특별 당부는 긴급 상임 위원회를 열어 시내 주요 지점에 봉안소와 분향소를 설치하여 조객을 맞이하는 한편 애도식 마련에 분주하였다.

서울에서 영결식이 열리던 1949년 7월 5일 오후 1시 15분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는 정해궁의 개회 선언으로 김구 주석 피습에 따른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애도식은 조포가 울리고 대회장인 인천시 부윤의 추도사에 이어, 한국 독립당 인천 시당 위원장 이기영김구 선생 약사 보고, 여중 합창대의 조가(弔歌)와 각 정당·사회단체의 헌화와 분양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서울과는 별도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김구 서거 애도식이 거행된 것은 김구 주석과 인천의 관계가 각별했던 데 대한 인천 시민들의 깊은 애도 때문이다. 김구는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의거를 일으키고, 해주 감옥에 수감되고 다시 인천항 재판소에서 3차에 걸친 신문을 받으면서 인천 시민들에게 애국심과 일제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미결수로서 인천 감리서 감옥에 수감 중 탈옥하여 일제하 한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이로 인해 김구가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전국을 순회할 당시 맨 처음 들른 곳이 바로 인천일 정도로 인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 기억을 김구는 『백범 일지(白凡逸志)』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 지방 순회를 시작하였다. 제1차로 인천을 순시하였는데,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 …… 22세 때 인천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가 23세 때 탈옥·도주하였고, 41세 때 17년 징역을 언도받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하였다. ……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나의 피와 땀이 젖은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있는 듯 49년 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 지난 일에 대한 감회를 금할 수 없는 인천 순시는 대환영리에 마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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