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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42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희

[인천 방송의 역사를 쓴다]

“까마득히 높은 철탑위에 은괴가 있을 거라고 했다. 누군가 그 은덩어리를 노리고 철탑을 기어오르다가 감전됐다느니, 중간에 경비원에 잡혔다느니 소문이 무성했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 하늘을 찌를 듯 바다 위에 우뚝 선 철탑 꼭대기에 있다던 은덩어리는 보리밥에 방귀만 ‘뿡뿡’ 대던 아이들에게 쌀밥을 꿈꾸게 했고, 밀린 공과금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았다. 아이들은 못 오를 철탑 위 은덩어리를 대신해 썰물 때 갯벌에서 드러난, 철탑으로 이어진 동선(銅線)을 잘라다 엿과 바꾸어 먹곤 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먼우금 가는 길 해안가에 서 있던 철탑을 둘러싼 김윤식 시인의 글이다.

이 철탑은 1956년,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들어선 극동 방송의 해외 송출용 안테나였다. 극동 방송은 중국과 소련, 북한 등 공산권 국가로 ‘복음 전파’를 하기 위해서 인천 상륙 작전이 있은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 바닷가에 철탑을 세웠다.

극동 방송이 서울로 이전해 기능을 다한 채 바닷가에 덩그러니 남았던 이 철탑은 1980년대 말 동양 화학[현 OCI 인천 공장]의 매립 확장으로 철거돼 빛바랜 사진 속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수십 년이 흐르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매립지에 경인 방송이 철탑을 대신해 들어섰다. 해방 이후 인천 시민 사회가 그토록 바라던 ‘인천의 방송’이 반세기를 훌쩍 넘겨 21세기를 목전에 두고야 겨우 세워졌다.

‘수도권’이라, ‘서울의 근교’라 방송국이 하나도 없어 TV 뉴스에 ‘문제아’로만 그려진 인천에 “지상파 방송국이 생겼다.”라는 시민의 자부심이 컸다. 메이저리그의 박찬호를 볼 수 있어 더 즐거웠다. 그러나 시민 사회가 함께 만든 경인 방송은, 인천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작 설립 7년 만인 2004년 12월31일 정파됐다.

아쉽게도 인천 시민 사회가 만든 ‘인천의 주파수’는 3년여 만에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 둥지를 튼 경인 TV OBS가 쓰고 있다. 하지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은 여전히 지상파 라디오 방송국 두 곳이 왕성히 활동하는 엄연한 ‘인천 방송’의 산실이다. 해외에 첫 방송을 송출한 대한민국 방송사의 한 획을 그은 곳이기도 하다. 어제도 오늘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은 인천 방송의 역사를 쓰고 있다.

[학익동에서 쏜 ‘복음 전파’는 서해를 넘어 중국 대륙으로]

1956년 12월23일 오후 5시 당시의 인천시 학익동 588번지에서 서해를 넘는 전파가 송출됐다. 중국 대륙을 넘어 소련에 이르고 북한까지 날아간 이 전파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송출 방송이었다. 2012년 현재 세계 4대 방송망 중 하나로, 전 세계 31억 명이 가시청권에 있고 54개국 128개 송신소에서 하루 645시간을 방송하는 극동 방송의 역사는 그렇게 인천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시작했다.

『극동 방송 50주년 화보사』는 1950년 8월 어느 일요일,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강태국 목사가 우연히 플로리다 상업 방송 사장 톰 왓슨을 만나 한국에 와서 복음 방송을 할 것을 권유한 것이 극동 방송이 태어나게 된 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 목사의 권유를 받은 왓슨은 복음 방송을 만들기로 하고 미국을 떠나 일본에서 1년간 머물다가, 1952년 한국에 들어와 2년여 만에 방송국 설립 허가를 얻어낸다.

재단 법인 한국 복음주의 방송 협회로 처음에는 김포 공항 인근인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리에 송출 안테나를 세워 시험 방송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송 전파가 항공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으로 송출 안테나를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인천을 선택한 이유는 염분이 있는 바다 근처에 송출 안테나를 세우면 전파가 강해지는데다, 6·25 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상륙 작전이 있은 ‘인천’이 미국에서 꽤 유명한 지역이어서다. 미국에서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할 때 인천에 자리 잡은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왓슨 선교사는 판단했다.

도로 포장이 안 돼 먼지 풀풀 날리는 동네에서 머리 노란 외국인들이 손수 벽돌을 쌓아 송신소 건물과 사택을 여러 동 지었다. 높이 133m 꼭대기에 ‘은괴’가 있을 거라던 철탑도 그때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앞바다에 섰다. 꽤 높은 구조물이어서 꼭대기에 항공 장애 표시등을 설치해 깜박깜박 불을 밝히면 인천 해안을 항해하는 선박에겐 등대 아닌 등대의 불빛이 되곤 했다.

전파는 왓슨의 생각한 것보다 강해 화재가 나는 등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밀물 때 바닷물이 빠지면서 갯벌에 파묻은 동선이 노출되곤 했는데, 동네 아이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아이들이 엿으로 바꾸려고 동선을 잘라가는 통에 종종 방송 송출이 중단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어렵사리 방송 준비를 마친 ‘한국 복음주의 방송국’은 1956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2월 23일 첫 전파를 송출했다. 하루 13시간 동안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으로 방송을 했다.

여전히 바닷가였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은 당시만 해도 교통편이 꽤 불편했던 인천의 외지였다. 그래서 극동 방송은 송신소와 안테나는 그대로 두고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맥아더 동상이 있는 자유 공원의 팔각정 아래 새 연주소를 짓고 이전했다. 새 연주소에는 사무실과 도서실, 음반 및 녹음테이프 보관소, 스튜디오, 아나운서 부스, 주조정실, 부조정실 등을 갖췄다. 이 건물은 극동 방송이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89로 이전한 후 웨딩홀로 쓰였다.

극동 방송은 인천에 있는 동안, 1964년 9월에 인천에서 열린 제45회 전국 체육 대회를 6일간 방송하기도 했다. 1966년 6월에는 제2회 인천 시민의 날을 맞아 특집 방송을 냈고, 이날 인천항 제2도크 기공식도 함께 중계했다. 인천광역시립 합창단 윤학원 감독이 젊은 시절 이끌었다던 극동 방송 전속 ‘팀 라디오 소녀 합창단’이 인천여자 상업 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비록 특정 종교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방송이었으나 인천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당시 『경기 일보』는 “지방 방송으로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춘 극동 방송국은 인천이 가진 자랑이 아닐 수 없다.”라고까지 극동 방송을 추켜세웠다.

하나 극동 방송은 아쉽게도 1967년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서 서울 마포구로 연주소를 옮기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으로 이전했던 송신소도 1988년 경기도 시흥시로 옮기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모두 마감한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바닷가에 서 있던 까마득히 높은 철탑은 ‘은덩어리 수수께끼’만 남긴 채 1980년대 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다만 2011년 초 극동 방송의 초기 사옥이 OCI 인천 공장[옛 동앙 화학] 공장 부지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 뒤, 이 건물에 대한 존치 논의가 지자체와 언론을 중심으로 일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방송 불모지 ‘인천’의 바람은 결실을 맺고]

극동 방송이 인천에 자리하기 훨씬 이전 인천에서 방송국 설치 운동이 일었던 적이 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21일자 『대중 일보』는 당시 임홍재(任鴻宰) 인천시장에게 조선 방송 협회 인천 출장소장이 방송국 설치 계획안을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인천 시내 라디오 청취자 8천 명에, 일본인이 두고 간 라디오 5천 대를 활용하자고 것이었다. 인천 시세 진흥회를 중심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장소로는 현 율목 도서관[당시 미군의 방무 별장]을 활용하면 된다고 했다. 부천·김포·강화를 청취 지역으로 포함시키자고 하는 등 구체적이었지만, 이는 인천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다.

극동 방송이 서울로 이전하기 전후로 한 차례 더 방송국 설립 운동이 인천에서 벌어졌으나 이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됐다.

인천이 직할시가 되고, 1992년 지방 자치 시대가 도래하면서 지역 내 방송국 설치 요구는 거세졌다. 선거철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공약을 내걸었고, 공중파 방송국이 잇따라 인천에 지국을 설립했지만 시민 사회의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했다. 여전히 TV 속 인천은 천덕꾸러기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1993년 우련 통운 배인흥(裴仁興) 사장이 주축이 돼 학계와 언론계, 종교계 등 인사가 참여하는 ‘가칭 FM 인천 방송국 주비위’가 구성되면서 방송국 설치 운동이 구체화했다. 1995년 개국을 목표로 공익 방송을 만들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인천광역시사』에서는 이 또한 갑작스럽게 좌초하고 말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도 여느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FM 방송 설치 움직임은 인천 TV 방송국 설립을 위한 시민운동으로 이어졌다. 1994년 5월 인천 지역 69개 시민 사회 단체로 구성된 인천 TV 방송국 설립 촉구 범시민 대책 협의회가 출범했고, 이어 15만 명이 참여한 범시민 서명 운동이 전개됐다. 물밀듯 시민 사회의 요구가 이어졌고, 인천상공회의소와 인천 발전 시민 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청와대, 공보처에 방송국 설립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마침내 1996년 3월에 공보처의 설립 확정 통보가 있었다. 이어 1997년 10월 11일 ‘인천 시민의 방송’인 인천 방송[후에 경인 방송 개명]이 탄생했다.

[박찬호로 ‘희망’ 던졌지만]

2004년 12월 31일 오전 11시 12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경인 방송 본사.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굳게 닫힌 정문 앞에서 300여 명의 사람들이 대형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7년여 간 몸담았던 경인 방송의 마지막 방송이 끝나는 순간,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1997년 10월 11일 인천 시민의 희망을 한 몸에 받고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태어난 경인 방송의 TV 송출은 허무마리만치 순식간에 중단됐다.

인천 방송[경인 방송으로 사명 변경]은 1994년 4월 당시 공보처가 발표한 ‘지역 민방 설립 계획’으로 처음 설립이 논의됐다. 하지만 수도권을 방송권역으로 한 SBS와 방송권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밀리고 밀리다 2차 지역 민방에 선정된 1996년 들어서야 설립 계획이 가사화되었다.

그해 2월 동양 화학은 인천 민방 사업 추진단을 발족하고, 이어 11월 대한 제당 등이 함께 주주로 참여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인천광역시와 시민 사회 단체 등의 힘을 등에 지고 다음해 10월 정보 통신부에게서 주파수 대역을 허가 받으면서 인천 방송 설립은 목전에 이르렀다. 당시 UHF 채널 21번이 인천 방송의 주파수 대역이었다.

1997년 10월 11일 개국한 인천 방송은 당시 SBS에 프로그램을 거의 의존했던 타 지역의 제2차 민영 방송과 달리 ‘100% 프로그램 자체 제작’이란 무모하리만큼 힘든 도전에 나서며 주목을 받았다. 방송가에 ‘VJ’란 시스템을 도입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소외 계층의 목소리를 담는데 주파수를 아끼지 않았다. 1998년 4월 IMF로 시름에 젖었던 한국 사회에 메이저리그의 ‘박찬호’를 통해 희망을 던져 주었던 것이 iTV 인천 방송의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전국의 유선 방송사가 박찬호의 경기를 재송신하면서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일부를 방송권역으로 했던 인천 방송을 일약 ‘전국 방송’으로 만들었다. 하나 박찬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거대 지상파 방송의 큰 자본에 밀려 박찬호 중계권을 잃은 경인 방송은 다시 지역의 작은 민영 방송으로 격(?)이 떨어지고 말았다.

인천 방송은 위기에서 기회를 찾고자 2000년 들어 사명을 경인 방송으로 바꿨다. 2003년 6월 30일 FM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했던 서울 지역 역외 재송신 허가도 2004년 7월에 따냈다. 그러는 사이 TV 주파수를 따낸 실질적 공로자인 인천 시민은 iTV 경인 방송에 등을 돌렸다. 표면상으로는 광고 수익을 더 걷어 재정난을 벗고자 함이었으나 iTV가 보여준 ‘서울’ 지향성은 수십 년간 ‘인천의 방송’을 원했던 인천 시민 사회의 바람을 철저히 외면한 처사로 지적됐다.

인천 지역 사회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한 경인 방송은 1%도 안 되는 미미한 시청률과 그에 따른 낮은 광고 수익, 그리고 주주와 경영진의 투자 의지 부족 등으로 인해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였다. 노·사 갈등이 첨예했고, 경인 방송은 미로 속을 헤맸다.

특히 인천 방송은 설립 당시 시민 사회가 “인천 시민들은 인천 방송을 기꺼이 시청할 자세와 애정을 갖고 있다. 기업적 측면보다 지역 사회 공익을 우선하는 자세로 방송에 임해야 한다.”는 요구를 잊은 채, 경영진이 방송을 사유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며 실망을 안기기도 했다.

2004년 12월 ‘공익적 민영 방송’을 요구하는 노조의 파업이 지속됐고, 노·사 갈등을 넘어 노·노간 감정의 골이 파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급기야 경영진은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언론사인 방송국에 구사대를 투입했고, 직장 폐쇄까지 결정했다. 방송 통신 위원회는 2004년 12월21일 iTV의 재허가 추천을 거부했다.

숨 가쁘게 급박했던 2004년 12월의 마지막 날. 경인 방송은 녹화해 두었던 ‘함께하는 세상’을 마지막 방송으로 송출했다. 그리고 오전 11시12분 경 애국가 1절이 다 끝나기도 전에 TV방송은 전파를 더 이상 쏘지 않았다.

[학익동, 인천 방송의 역사를 쓰고 있다]

경인 방송 정파 이후 인천의 시민 사회 단체가 ‘인천의 주파수’를 되찾아오자고 다시 한 번 일어섰다. 덩달아 경인 방송을 잃은, 가시청권의 경기 지역 시민 사회 단체도 힘을 보탰다. 비록 1990년대 움직임과 다르게 시민 사회가 두 갈래로 나뉘긴 했어도 ‘인천의 주파수’를 되찾자는 데는 뜻이 다르지 않았다.

‘희망 조합’으로 부르던 iTV 노조원들도 ‘지역 방송’으로서 제 노릇을 약속하며 시민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방송 통신 위원회의 재허가 추천 거부 대상이 아니어서 2005년 3월 방송을 재개한, 라디오 부문의 방송을 위해서 경인 방송에 남았던 임직원들도 ‘iTV 살리미’로 움직였다.

방송위원회는 2007년 4월5일 경인 티브이에 대해 조건부 허가 추천을 결정했다. 그리고 iTV 정파 1093일 만인 그해 12월28일 OBS 경인TV는 첫 전파를 쐈다. 인천·경기 지역 시민 사회 단체가 힘을 보태고 iTV 희망 조합원이 주축이 돼 태동한 OBS는 방송국을 최대 주주인 영안 모자의 본사가 있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 두었다.

비록 새 TV 방송국이 인천을 떠났어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는 여전히 지상파 라디오 방송국 두 곳이 인천 시민의 눈과 귀가 돼 활동하고 있다.

TV 정파 후 음악만 틀던 iTV FM은 2005년 3월 방송을 재개했다. 법인 영업 활동을 다시 하는 한편, 5월 동양 제철 화학의 지배 주주 포기 선언에 이은 신규 투자자 영입 시도 등 정상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해 12월 ‘iFM 라디오’ 방송사로 방송국 재허가 추전을 받아, 이듬해 4월 사명을 라디오 인천으로 바꾸었다가 2008년 경인 방송 iTV FM으로 옛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됐다.

법정 관리를 조기에 졸업하려고 IPTV 사업 진출 등 사업 영역을 다양화하는 등 부단히 애를 써 2011년에 그 결실을 맺었다. 2011년 10월 11일 전파 출력을 1㎾에서 5㎾로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시사·보도 기능을 강화해 인천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인천·경기 소식을 주로 전하면서 경인 지역 시청자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천 지역 운전자의 눈이 돼 주고 있는 TBN 인천 교통 방송은 2001년 말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개국했다. 당시 인구 250만 명의 도시 인천은 신공항 건설과 송도 국제 도시 건설, 구도심 개발 등 각종 건설 사업으로 교통망이 확대되고 있어 지역 교통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라디오 방송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부산·광주·대구·대전 등지에는 있지만 인천에는 없었던 교통 방송국 설립 추진이 1997년 12월 시민 대책 협의회가 구성되면서 이루어졌다.

시민 사회의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1999년 2월 인천광역시 의회가 방송국 설립 촉구 결의안을 청와대와 국회, 문화 관광부 등에 전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또 한 번 시민 사회의 노력이 있어 교통 방송국 설립 허가가 났다. 2000년 11월 3월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대우 전자 앞에 청사를 착공, 1년 뒤인 2001년 11월 30일에 개국했다. 개국 10주년을 맞아서는 인천 시민과 함께하는 ‘공익·교통 전문 방송’으로 재도약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보도 기능도 추가하는 등 지역 밀착형 프로그램으로 인천 지역 운전자의 눈과 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극동 방송에서 시작해 인천 방송과 지금의 iTV 경인 방송, TBN 인천 교통 방송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인천 방송의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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