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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038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허은심

[박두성을 만나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있는 문학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서쪽 봉우리 노적봉 아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있는 인천광역시 시각 장애인 복지관과 만난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공간인 인천광역시 시각 장애인 복지관 1층에는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1888~1963] 기념관이 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 장애인의 권익 증진을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다한 송암 박두성의 애맹 사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시각 장애인들의 세종 대왕’으로 불리는 송암 박두성은 1910년대 서울 맹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 재직 당시 일본어 점자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1920년부터 사재를 털어 남몰래 한글 점자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6년 만인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 불리는 한글 점자를 처음 창안해 반포했다. 정부는 박두성의 공로를 인정해 1992년 은관 문화 훈장을 추서했고, 인천광역시도 강화군 교동면이 고향인 박두성을 추억하며 1999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에 별도 기념관을 지어 뜻을 기리고 있다. 여기에 송암의 흉상 및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 송암은 생전에 송암을 만난 이들의 증언처럼 엄하면서 인자하다.

[지인들에게 박두성 이야기]

1. 박두성의 딸 박정희 할머니에게 듣는 선친의 이야기

전시관의 전시품 일부는 박두성의 딸인 박정희가 기증한 것들이다.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 평안 수채화의 집에서 원생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박정희는 선친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회갑연 때 축하하러 온 맹인과 하객들에게 답사를 하시는데 나는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무슨 훌륭한 뜻을 품고 맹인 학교에 간 것이 아니고 남의 집에 살고 있던 내개 월급에 사택까지 준다고 하니 방 두 개의 매력 때문에 가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맹아부의 학생들을 보고나니 ‘나는 두 눈이 멀쩡한데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데 안 보이는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이 읽을 점자를 만들고 읽을거리를 찍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맹인 교육 사업에 변함이 없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맹아 학교 측의 권고사직으로 일자리를 잃고 있을 때 정동 교회에서 처량한 형편을 알고 인천 영화 학교장으로 보내게 되었어요. 영화 학교 가기 전 인생의 밑바닥에서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한 때였었지요. 내가 사범 학교 1학년 때 영화 학교로 오셨고 내가 졸업할 때는 율목동 집에서 동장으로 계셨어요. 월급 없는 명예직. 그러니 생활이 많이 어려웠지요. 그래도 돌아가시기까지 한결같이 맹인 사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난 아버지가 의붓아버지인 줄 알았어요…” 라고 말했다.

박두성은 당시 물자가 풍부하지 않았던 때에 점자를 쓸 종이를 구하기 위해 중앙청, 조선 은행 등을 돌면서 묵은 장부나 출근부라도 구해 점자책을 만들었는데 점자책 만드는 작업에는 늘 그의 딸 박정희가 있었다. 점자책을 만들려면 책을 읽어 주는 이가 필요했다. 그 일을 도맡아 한 것이 어린 딸 박정희였다. 8살 무렵부터라고 하니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어린 아이가 아버지 옆에 앉아 재미도 없고 게다가 활자도 작은 성경책을 졸음을 이겨가며 날마다 읽었고 그 아버지는 아연판을 두드리며 점자를 찍었던 것이다. 시각 장애인의 세종 대왕이라 불리는 아버지와 그것을 묵묵히 돕고 있는 딸의 모습은 세종의 딸인 정의 공주를 연상시켰다.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에 있어 직접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의 공주가 있었다. 죽산 안씨 가문의 족보에 시집온 정의 공주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대군들이 풀지 못한 변음과 토착을 정의 공주가 풀어 올려 칭찬과 함께 노비 수백 구를 상으로 주셨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세종의 직계 가족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점자를 만들고자 숱한 시련을 견뎌낸 박두성과 그의 딸 박정희가 어린 나이에도 고단함을 견디며 점자로 옮기는 일을 도와 아버지의 든든한 협력자로 점자책을 만드는 과정 또한 한글 창제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점자를 창안한 아버지나 그의 유지를 잇는 딸은 자신 들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자랑을 일삼는다거나 하는 교만함이란 없었다.

2. 제자 이미경의 책 속 박두성 이야기

『점자로 세상을 열다』의 작가 이미경은 백혈병으로 시신경에 문제가 생겨 시각 장애 1급이 된 아들 동균이로 인해 박두성을 알게 되어 답사와 조사, 후손 면담을 통해 이 책을 냈다.

우리 모두가 장애우에 대한 생각이 별반 다를 것이 없듯이 저자도 아이가 저시력 장애를 격기 전에는 시각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의 장애 때문에 엘리베이터에서 안내 방송이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나 점자 블록을 아무 생각 없이 가리는 사람 때문에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점자를 배우고 아이에게 가르치면서 일제 강점기에 시각 장애인들이 교육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애쓴 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말과 글이 탄압받던 시대에 오히려 한글 점자를 만들어 눈먼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박두성의 일생을 좇아 자료를 모았던 것이다.

‘능숙한 목수는 굽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일제 강점기 어려운 맹아 학교 교사 생활을 꿋꿋하게 해나간 박두성의 신념이야말로 맹인들에게 빛이 되는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게 했다.

박두성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점자 교육을 받도록 하기위해 평양, 신의주, 나남, 청진에까지 전국 곳곳에 담당 간사를 두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공부한 맹인 학생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서 김천년 같은 이는 후에 맹인 학교 교사가 되어 많은 맹인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박두성은 육화사를 통해 점자 통신 교육을 하였다. 학교로 직접 나오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점자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우편 통신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박두성의 아내인 김경내가 침을 놓아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경희는 박두성에게 점자 제판기 다루는 법은 배워 열심히 성서를 점역한 끝에 2년 후 점자 『신약 성서』, 점자 『구약 성서』를 완성하게 된다. 이후 이경희는 도서관의 점역사가 되어 평생 숱한 사람들의 눈을 밝혀 주는 일을 하게 된다.

직접·간접으로 박두성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하였으며, 박두성의 애맹 사상은 시각 장애인의 향학열에 불을 댕기어 수많은 석사·박사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을 불편하게 한 박두성의 문화 운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 조선어 과목을 없애려 하자 송암은 “눈이 없다고 사람을 통째로 버릴 수 있겠어요.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안 가르치면 이중의 불구가 돼 생활을 못하는 것”이라며 “눈 밝은 사람들은 자기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읽고 쓸 수 있지만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 먼 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요.”라며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두성은 일본인 교사들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나온 후에는 딸 정희에게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자신의 말을 잘 간직할 수만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소 그가 갖고 있던 신념을 확신으로 심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두성의 문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맹인들만 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한국이 살 길을 연구한 거지, 맹인만 측은해 한 것이 아니지요. 맹인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간곡하게 부탁하고 타이르며 맹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했는데 돌아가신 지 45년이 지났는데 시각 장애인에 대한 생각은 많이 변했지요. …확실히 문화 운동이었어요…”

박두성은 한글을 쓰지 못 하던 시기에 한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고 비록 점자라고는 하나 한글로 교육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맹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맹인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를 교육했던 것이다. 이러한 박두성의 점자 교육은 식민지 시대 일본인들이 어찌할 수 없었던 문화 운동이었다.

이러한 박두성의 문화 운동은 맹아 학교 제자인 이상진과 함께 만든 최초의 조선어 점자 주간지 『촛불』로 이어진다. 주간 회람지인 촛불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200여 호를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이상진은 후에 서울 맹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육화로 꽃피어 손끝으로 열린 세상 열매를 맺다 ]

송암 박두성 전시관에는 여섯 점 점자를 뜻하는 ‘육화(育花)’가 새겨진 점자 원판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생활 속 조금만 관심을 갖고 둘러보면 많은 점자와 만난다. 엘리베이터의 버튼마다 새겨진 점자. 음료수 캔 따는 손잡이 옆에 표기된 점자, 지하철 계단 손잡이에 있는 점자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곳에 표기된 점들은 바로 시각 장애인들이 언제나 세상과 소통하도록 시들지 않게 피어 있는 꽃들이다.

2010년 이외수의 베스트셀러에 “낱말도 씨앗이다. 씨앗을 심는다고 다 싹이 트는 것은 아니다. 싹이 튼다고 하더라도 다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꽃이 핀다고 하더라도 다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다. 이제 살과 뼈로 거름을 삼고 피와 눈물로 뿌리를 적실 각오를 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박두성의 애맹 사상이 6개의 점자, 육화로 태어나 시각 장애인의 손끝에서 세상과 소통의 길을 열어 주고 세상 속에서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한 인간으로서 열매 맺어 설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은 또 다른 시각 장애인들의 네트워크가 되어 살아가는 씨앗의 역할을 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박두성의 애맹 사상에 가족들과 제자들의 묵묵한 응원을 거름삼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그 뿌리를 적시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박두성의 훌륭한 사상을 모두 공유하고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시각 장애인에 대한 지역 사회의 봉사 활동도 확대되고 있다. 최근 인천광역시 시각 장애인복지관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에 있는 인항 고등학교는 2012년 4월 4일에 인항 고등학교에서 학생 봉사 활동 업무 협약식을 가졌다. 앞으로 인항 고등학교 전교생이 시각 장애인을 위한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각종 행사에 대한 지원과 더불어 점자책 제작을 위한 원고 작성, 점자 교정, 낭독 봉사에 나선다고 한다. 복지관 측에서는 준비된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애인 인식 개선 교육과 실명 예방 교육, 그리고 점자 역사 교육 등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장애인, 비장애인, 지역 주민 서로가 시각 장애인에게 따스한 마음을 열어 가고 있다.

“아버지 생가 복원이 마지막 꿈이에요.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잘 했다’는 칭찬도 듣고 싶고...”

2011년 11월 4일 제85회 점자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정희는 수년째 방치돼 폐가처럼 된 생가와 국립묘지 이장 요청 거절로 현재 야산에 있는 선친의 묘소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이에 박정희와 송암 박두성 선생 문화 사업 선양회는 생가를 복원하고, 생가 터 일대 700㎡를 매입해 묘를 이장한 뒤 묘역 주변을 공원으로 꾸미기로 했다.

그리고 서양화가인 박 할머니는 재원 마련을 위해 2010년 3월 초 인천광역시 종합 문예 회관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딸 유명애와 모녀전을 열기도 했다.

“수차례 개인전과 자선전에서 얻은 수익금을 점자 도서관 건립 기금이나 중도 실명자 장학기금으로 내놓았지만, 아버지를 위한 전시회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박정희는 지금도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 ‘평안 수채화의 집’에서 원생 20~30명을 가르치고 있다. 진흥 아트 홀 관장을 지낸 딸 유명애는 강원도 춘천시에서 복지 시설을 운영 중이다. 이처럼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박두성의 유지를 잇고 있다.

박두성의 유지는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이경희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희랍어에 법전까지 수백 권이 넘는 책을 점역하고 시각 장애 학생들이 대학 입학시험을 볼 때면 교수실에 함께 들어가 시험지를 점역하기도 했다. 이상진은 박두성의 전기를 육성으로 녹음하여 처음 발간하였다. 박두성과 그를 도운 사람들은 조금도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산 사람들이다.

[문학산 자락에서]

우리나라의 장애인을 위한 사회의 제반 여건은 21세기를 맞은 지금도 아직 선진 복지 제도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는 송암을 추모하고 그 뒤를 따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2012년 4월 4일 인천광역시 시각 장애인 복지관인항 고등학교의 학생 봉사 활동 업무 협약식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처럼 더 많은 기관이나 단체가 이러한 협약을 통해 안정적인 봉사 인력 확보와 봉사 활동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박두성의 스승인 이동휘는 암자의 소나무처럼 푸른 절개를 굽히지 말라고 송암이라는 호를 주고 남들이 하지 않은 일에 평생을 바치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시각 장애인 복지관을 싸안고 있는 문학산노적봉에서송암 박두성 선생이 시각 장애인들의 모습과 더불어 사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한눈에 내려 본다. 그리고 스승의 말씀에 따라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며 서해 바다를 응시하는 따뜻한 눈빛을 상상해 본다.

강화군 교동에서 태어나자란 어린 시절 박두성이 한달음에 올랐을 화개산에서 바라보던 그 바다처럼 가슴 후련하길 기원해 본다. 이제 박두성은 그 바다를 이어 노적봉아래서 당신을 그리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지금도 박두성의 딸 박정희는 ‘평안 수채화의 집’에서 원생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아버지의 뜻을 이어 시각 장애인을 위한 기부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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