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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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戰取國民大會 |
이칭/별칭 | 대한 독립 전취 인천 국민 대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석 |
[정의]
1946년 5월 19일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인천 지부 주최로 개최된 신탁 통치안 반대 집회.
[개설]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이승만이 1945년 10월 23일 결성한 독촉 중앙 협의회를 모체로 하여 결성된 전국적 규모의 우익 연합 단체로 1946년 2월 8일 조직되었다.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자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형성을 위해 국민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1946년 5월 19일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인천 지부 주최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소재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독립 촉진 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자 인천 지역의 좌익과 우익은 ‘신탁 통치 반대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고 ‘신탁 통치 절대 반대’ 입장을 공동으로 견지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좌익이 입장을 바꾸면서 신탁 통치안을 둘러싼 인천 지역의 좌·우익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먼저 우익은 1946년 1월 16일 한국 민주당 발의로 ‘반탁 각 단체 대표 연합회’를 조직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좌익은 1946년 2월 7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를 결성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와 이후의 정세 변화에 대비해 나갔다. 이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과 함께 미 군정의 좌익 탄압이 가속되자 우익은 이에 발맞춰 반탁에 대한 대규모 선전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1946년 5월 19일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소재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독립 전취 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경과]
1946년 5월 19일 지금의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소재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주최로 독립 전취 국민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승만 환영 대회도 겸한 독립 전취 국민 대회에는 모두 1만여 명의 군중이 참석하였으며 ‘대회 선언’과 ‘결의5개조’가 발표되었다.
이승만은 독립 전취 국민 대회에 참석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 있게 싸워야 되오. 다 같이 일어섭시다. 우리 독립을 해하는 공산당을 몰아내도록 싸웁시다. 저들은 저들이 조국이라고 부르는 데로 가서 살라고 쫓아냅시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하는 애국가와 같이 우리나라를 우리 손으로 이룩합시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소련에 동조하는 좌익들에 대한 격앙된 감정을 나타냈다.
좌익들은 행사장인 인천 공설 운동장에 “반미 반소 대회이며 …… 삼상 회의 결정을 탁치 반대로 모략 선전하여 …… 자본가와 대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는 전제 정부를 세우려는 것.”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며 대응하였다.
[결과]
1946년 5월 19일 개최된 독립 전취 국민 대회에서는 ‘대회 선언’을 발표하고 ‘결의5개조’를 천명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소 공동 위원회 정회(停會)의 책임을 구명하여 국제 여론의 심판을 구함.
② 신탁 통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자주 독립의 자율적 수립을 촉진하여 민의의 귀일(歸一)을 기(期)함.
③ 38장벽의 철폐를 목표로 국민 동원의 실적을 거(擧)함.
④ 악질 분자의 반역적 언동을 일소하여 민족 강기의 숙청을 도(圖)함.
⑤ 우방 선린의 협력하에 경제건설에 매진을 기(期)함.
독립 전취 국민 대회 이후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가 6월 23일 ‘미소 공위 촉진 인천 시민 대회’를 개최하여 우익의 반탁 운동에 대응하는 등 인천 지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이듬해까지 계속 이어졌다.
[의의와 평가]
1946년 2월 8일의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결성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 세력의 대중적 정치 기반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이루었다.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가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한 독립 전취 국민 대회는 반탁 운동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승만과 보수 우익 세력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 작업을 이끌어간 집회였으며 우익 단체들의 통합을 꾀하는 한편 이승만에 대한 지지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형성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