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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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國獨立紀念日行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정의]
1946년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아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념 축하행사.
[유래]
미국 독립 기념일은 미국의 공휴일 가운데 비종교적인 것으로는 가장 성대한 기념일이다. 대륙 회의가 독립 결의안을 실질적으로 승인한 것은 7월 2일이고, 독립 선언문이 공식 발표된 것은 7월 8일이었지만 독립 선언문의 초안이 만들어진 것은 7월 4일이었다. 독립 선언 제1주년 축하 행사는 필라델피아에서 즉흥적으로 열렸을 뿐, 축하 행사가 보편화된 것은 1812년 남북 전쟁 이후였다. 그 뒤부터 각종 공익 단체들이 민주주의 이념과 시민 정신을 이날의 애국심과 결부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1817년 운하 착공, 1828년 미국 최초의 철로 공사, 1850년 워싱턴 기념비 정초식, 1946년 필리핀 독립의 공식 승인 등 많은 공익사업이 7월 4일을 기해 시작되었다.
[경과]
1946년 7월 4일 오전 9시 정각에 인천부 도원동 소재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인천부 당국의 주최와 여러 단체의 대표, 지역 유지, 부민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독립 기념일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공설 운동장에서의 공식 기념행사가 끝난 뒤에는 애관 극장에서 여흥 프로그램까지 준비하여 부민과 함께 공개, 경축하였다. 인천부와 부민들이 마련해 준 기념식 행사에 대해 인천 미군정 당국은 와그너 소좌를 통하여 인천 부민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46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 기념일 행사가 인천에서, 그것도 인천 시민들에 의해 개최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사대주의’로 매도할 필요는 없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영국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한국을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준 ‘은인’으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38도선 이남을 통치하면서 통일 민주 정부를 출범시킬 미․소 공동 위원회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 행사는 인천 시민들이 미국에 대한 바람과 조속한 정부의 출범을 염원하는 차원에서 행사를 열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 행사는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후 다시 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