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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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집필자 | 김덕묵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 사람들이 착용해 온 의복이나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의생활은 생활 문화의 한 요소로서, 일상생활이나 의례 때에 착용했고 현재도 착용하고 있는 복식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일상복으로 한복을 입었으나 오늘날 한복은 특별한 경우에 입는 옷이 되었고 일상에서는 양장을 입는다.
[의례복]
의례복은 혼례나 제례 등 각종 통과 의례 시에 예를 갖추기 위해 입는 옷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각종 의례가 행해질 때 입었던 의복으로는 아기의 돌복, 성년식의 관례복, 결혼의 혼례복, 회갑의 회갑연복, 상례의 상복, 제례의 제례복 등이 있다.
[일상복]
우리나라의 의복 제도는 1894년에 갑오개혁과 그 이듬해의 을미개혁으로 구미식 의복과 단발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서양 옷차림은 궁중과 정부 요인 그리고 상류층에 국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학생들이 양복화된 교복을 입기 시작하였으며 6·25 전쟁 이후 공장에서 양장(洋裝)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시장에서 판매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복을 입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남자는 국방색 국민복 상의에 당꼬바지를 입고 여자는 왜 바지 위에 치마를 입는 사람도 있었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어른들 앞에서 바지를 입는 것이 어색하여 바지 위에 치마를 입고 있다가 일터에 나가서는 치마가 불편하므로 바지 속에 치마를 넣고 일을 하곤 했다. 인천 지역의 여러 곳에서도 왜 바지를 입고 밭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바지는 치마보다 작업할 때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후 강화군 내에서 인조견 직물이 가내 공업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6.25 전쟁 이후 섬유 공업이 흥성해져 값싸고 강인한 나일론 합섬 제품이 선풍을 일으켜 모든 이가 의복 생활을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일론계 제품은 저렴한 반면에 통풍성이나 흡수성이 없어 차츰 의상계에서 멀어져 갔고 대신에 자연섬유질 제품을 선호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여성들은 8·16 해방 이후 맘보바지, 미니스커트, 나팔바지, 핫팬츠, 원피스, 투피스, 디스코 바지, 칠보 바지, 판탈롱 등 유행 따라 의복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남자들은 한때 반바지, 당꼬바지가 잠시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양복의 기본형을 벗어난 옷차림은 없었다. 여자 옷에 비해 변천이 다양하지 않지만 남녀 의복 모두 시류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도 시장에서 옷을 사기 전에는 치마저고리와 가랑 바지, 중의 적삼 등을 입었다. 과거에는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많아 옷감을 구입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일대에는 베를 짜는 사람이 없었다. 베를 지게에 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행상에게서 베를 산 후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다. 당시에는 옷감이 귀하여 이불도 부족하고 베도 부족했기에 의생활이 여유롭지 못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거주하는 이상분의 경우에는 2012년 현재 64세인 딸이 젊었을 때 방직 공장에 다녀서 옷감을 얻어와서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에 가서 간혹 양장을 사와서 입는 사람이 드물게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복을 입었다. 일제 강점기 때 “왜놈들이 몸빼를 입으라고 난리치고 깡통 치마 입고 광목에 검은 물을 들여서 입기도 하였다.”라고 한다. 당시에도 대부분은 베로 옷을 지어 입었다. 시장에서 양장 옷이 판매되면서 동인천에 가서 옷을 사 입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