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1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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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應泰 |
이칭/별칭 | 벽안(碧眼)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손민환 |
성격 |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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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미상 |
대표경력 | 경기 일보 부사장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7월 23일 - 김응태 출생 |
수학 시기/일시 | 1933년 - 김응태 영화 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1944년 - 김응태 인천 우체국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1947년 - 김응태 인천부 판임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1966년 - 김응태 『주간 인천』 편집국장·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54년~1966년 - 김응태 『인천 신문』 편집국장·부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66년~1973년 - 김응태 『경기 일보』 편집국장·부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 - 김응태 언론 통폐합 조치로 언론계 은퇴 |
활동 시기/일시 | 1973년~1980년 - 김응태 인하 대학교 사무처장·사무국장·이사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95년 7월 29일 - 김응태 사망 |
활동지 | 인하 대학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인하로 100[용현동 253] |
[정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가계]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응태(金應泰)[1921~1995]는 1921년 7월 23일에 태어나 인천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나서야 인천 공립 상업 보습 학교[현 인천 남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인천 우체국에서 우편 서기보로 근무했으며, 해방 직전 인천부[현 인천광역시청]으로 옮겨 1947년까지 공직 생활을 했다.
김응태는 10여 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인천광역시 최초의 지방 신문인 『대중 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54년 창간된 『주간 인천』에서 편집국장과 사장을 역임하였고, 『주간 인천』이 『인천 신문』으로 명칭 변경된 이후에도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김응태는 『경기 일보』에서 편집국장과 부사장을 지내다가 1973년 유신 정권의 언론 통폐합 조치로 언론계에서 은퇴하였다.
김응태는 언론계에서 은퇴 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위치한 인하 대학교에서 사무처장, 사무국장, 이사를 역임하였다. 김응태는 1995년 7월 29일 별세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71년 6월 말부터 1972년 4월 말까지 『경기 일보』에 고정으로 실렸던 ‘바람개비’ 원고 중 일부가 김응태가 직접 쓴 원고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