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631 |
---|---|
한자 | 美蘇共委-臨時政府促進大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현주 |
[정의]
1947년 7월 27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가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한 집회.
[개설]
좌익 계열의 ‘민족 통일 전선’ 조직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가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을 촉진한다는 취지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한 집회이다.
[역사적 배경]
미국과 영국, 소련의 3개국 외상은 1945년 12월 16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3개국 외상 회의를 열고 그 해 12월 27일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서」를 채택,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한국 임시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신탁 통치 조항은 정부 수립 운동에 매진하던 각 정치 세력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상해 임시 정부와 한국 민주당 등 우익은 격렬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일으켰고, 조선 공산당 등 좌익은 처음에 반탁 운동을 전개하다 선회하여, 모스크바 3상 결의 지지와 함께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싼 좌우 대립과 좌우 각 진영 내 분열,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 등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친 미·소 공동 위원회는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좌익은 1946년 6월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직후부터 인천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를 열어 우익의 반탁 운동에 대응하면서, 미·소 공동 위원회를 재개하여 조선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경과]
1947년 7월 27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는 미·소 공동 위원회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 촉진을 위한 대회를 아침 9시부터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당일엔 아침부터 비가 내렸으나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 산하의 각 단체들과 적지 않은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대회는 인천시 인민 위원회 김형원의 사회로 시작되어 상례(常例)에 따라 명예 회장에 당시 좌익 계열의 거두인 박헌영·허헌·김원봉을 선출하고 대회 의장에 남기목 외 11명을 지명하였다. 이어 연사들이 연단에 올라 공전되고 있는 미·소 공동 위원회의 재개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연설을 이어갔다.
[결과]
각 연사들이 등단하여 이승만과 김구를 맹렬히 성토하자, 청중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광복 청년회 소속 이송근이 연단 위로 뛰어 올라 격렬하게 항의하여 회장이 일시 소란해졌으나 경비 경찰에 의해 저지·퇴장되었다. 이어 대회는 계속 진행되었으나 이어진 폭우로 인해 자연 해산 상태에 빠졌다.
당시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주최 측인 민주주의 민족 전선 인천 지부는 미·소 공동 위원회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 촉진을 위한 대회 산회 시에 도원교 부근 숲속에 테러단을 잠복시켰다가 민족 진영 인사에게 공격을 감행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이 계획은 위장 프락치인 이옥병에게서 당시 인천시청 감찰 위원장이 사전에 탐지하여 오히려 역 공세를 취함으로써, 공격의 대상이던 서북 청년회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있던 광복 청년회는 인천시 도원동 일대 좌익들의 계책에 말려들어 출동하였다가 공격을 당하여 김대섭[광복 청년회원]이 그 자리에서 피살되고 김용담[자유 노조 조직원]은 중태에 빠지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의의와 평가]
미·소 공동 위원회와 조선 임시 정부 수립 촉진을 위한 대회를 분기점으로 인천의 좌익과 우익은 사실상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진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