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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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善 |
이칭/별칭 | 자수(子粹),서포(西浦),정헌(貞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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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관직 | 인천도호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박동선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박동선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3년 4월 - 박동선 인천 도호부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박동선 인천 도호부사 파직 |
몰년 시기/일시 | 1640년 - 박동선 사망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지낸 문신.
[개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1603년 4월 인천도호부로 부임하여 이듬해 9월 윤달까지 약 18개월간 복무하다가, 물건을 실어 나르던 조운배가 전복된 일로 파직되었다.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수(子粹), 호는 서포(西浦)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박응천(朴應川)이고, 어머니는 김희려(金希呂)의 딸이다. 청성군(淸城君) 이걸(李傑)의 딸을 처로 맞았고, 아들이 금주군(錦州君) 박정(朴炡)이다.
[활동 사항]
박동선(朴東善)[1562~1640]은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90년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7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병조 좌랑을 거친 뒤 남포 현감으로 이몽학(李夢學)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웠는데, 논공행상에서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제외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켰다. 그 뒤 성균관 전적, 사복시정(司僕寺正), 경기 도사, 수안 군수를 역임하고, 1603년 4월 인천도호부 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약 18개월간 인천도호부에서 복무하다가 조운배가 전복된 일로 파직되었고, 다시 부평도호부, 남양도호부의 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뒤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패륜 행위에 불만을 품어 사양하였다가 참의로 임명되었고, 이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 참의로서 인조를 모시고 충청도 공주로 피란 갔다가 난이 평정된 뒤 돌아와 가선대부로 대사헌이 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수행했고, 이후 형조 판서․좌참찬․우참찬․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도 왕손을 호종(護從)하고 강화, 교동(喬桐), 호서(湖西) 등지로 피란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한성부로 돌아와 좌참찬이 되었고, 3년 후인 1640년 사망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졸기(卒記)[조선 시대에 어떤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사관들이 판단해 적은 기록]에 따르면 박동선은 “사람됨이 순후하고 근실하였는데, 비록 굽히지 않는 강직한 자태는 없었으나 조정에 선 지 50여 년이 되도록 하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서포 기문(西浦記聞)』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정헌(貞憲)의 시호(諡號)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