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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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慶新 |
이칭/별칭 | 중길(仲吉),한천(寒泉),삼곡(三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은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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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죽산(竹山) |
대표관직 | 동래 부사|경상도 관찰사 |
출생 시기/일시 | 1560년 - 박경신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박경신 문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26년 - 박경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6년 - 박경신 증직 |
묘소|단소 | 박경신 묘 - 인천도호부 다소면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에 묘소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문신.
[가계]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는 중길(仲吉), 호는 한천(寒泉) 또는 삼곡(三谷)이다. 아버지는 장령 박사공(朴思恭)이고, 어머니는 윤징(尹澂)의 여식인 무송 윤씨(茂松尹氏)이다. 심우선(沈友善)의 딸인 청송 심씨(靑松沈氏)와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박경신(朴慶新)[1560~1626]은 1560년(명종 15) 태어나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했고,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폐 제거에 힘써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수축하여 방비 태세를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재임하면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 파직 당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뒤 서흥 부사(瑞興府使)로 기용되었고, 이어 동래 부사(東萊牧使), 삼척 부사(三陟牧使),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박경신은 광해군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양주 목사(楊州牧使), 판결사(判決事) 등을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 경상도 관찰사, 1622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판결사로 있을 때는 인목 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광해군 때의 행적에 대한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한 인조의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을 호종하지 않은 죄목으로 문외 출송(門外出送)[죄지은 사람의 관작(官爵)을 빼앗고 도성(都城)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을 당하였다.
[묘소]
『인천부 읍지(仁川府邑誌)』 총묘(塚墓)조에 따르면 박경신의 묘소는 인천도호부 다소면[현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잔존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상훈과 추모]
1816년(순조 16) 이조(吏曹)의 제안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한 가문에서 세 사람이 왜적을 토벌한 공이 드러나 박경신과 함께 박경전(朴慶傳), 박경윤(朴慶胤) 등을 증직(贈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