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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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商悳 |
이칭/별칭 | 정사(正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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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병조 정랑|규장각 직각|예조 좌랑|성균관 대사성|인천 부사 겸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 |
출생 시기/일시 | 1852년 - 김상덕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김상덕 경과 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89년 - 김상덕 병조 정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0년 - 김상덕 규장각 직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2년 - 김상덕 성균관 대사성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3년 - 김상덕 인천 부사 겸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김상덕 지도군 고군산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5월 30일 - 김상덕 의병 가담죄로 10년 유형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4월 - 김상덕 유형에서 풀려남 |
몰년 시기/일시 | 1924년 - 김상덕 사망 |
활동지 | 인천도호부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349-2 |
[정의]
조선 후기 인천 부사 겸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仁川府使兼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재직한 문신이자 을사늑약 이후 활동한 의병.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사(正斯)이다. 아버지는 김창재(金昌載)이다.
[활동 사항]
1852년에 태어난 김상덕(金商悳)[1852~1924]은 1888년(고종 25)에 경과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89년(고종 26)에 병조 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 천진(天津) 주재 독리(督理) 김명규(金明圭)의 종사관이 되었다. 1890년(고종 27)에는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고, 다음해에 예조 좌랑이 되었다. 1892년(고종 29)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93년(고종 30)에는 인천 부사 겸 감리 인천항 통상 사무(仁川府使兼監理仁川港通商事務)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1894년 6월에 감리사로 감하되어 교체되었다. 1896년 6월에 홍주부 관찰사(洪州府觀察使)로 임명되었으나, 그 직을 사양하였다는 이유로 지도군(智島郡) 고군산(古群山)으로 2년의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8월에 풀려났다.
1906년(고종 43)에는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키자 군사(軍師)의 책임을 맡아 적극 가담하였다. 1906년 5월 19일에는 민종식과 함께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1906년 5월 30일 일본군에 진압되어 붙잡혀 10년 유형을 받았다가, 1907년 4월에 풀려났다. 1924년에 사망했다.
[상훈과 추모]
1991년에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