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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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謹行 |
이칭/별칭 | 중보(仲甫),용재(庸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현숙 |
성격 | 문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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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관직 | 사어/김포 군수/인천 부사 |
출생 시기/일시 | 1712년 - 김근행 출생 |
활동 시기/일시 | 1759년 - 김근행 김포 군수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780년 - 김근행 인천 부사 역임 |
부임|활동지 |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보(仲甫), 호는 용재(庸齋)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진사 김시서(金時敍)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로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송이석(宋彛錫)의 딸이다. 강규환(姜奎煥)의 문인이기도 하다.
[활동 사항]
김근행(金謹行)[1712~?]은 김시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경전을 통달하여 대기(大器)가 될 수 있다는 촉망을 받았다. 1740년(숙종 28)에 증광시에 합격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가 되었다. 세자익위사 세마로 있을 때 경연(經筵)에서 『상서(尙書)』의 태갑(太甲) 상·하를 강의하였고, 사어(司禦)로 있을 때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의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12월에 인천 부사로 부임하여 1780년(정조 4) 11월에 교체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교육에 힘써 서린(西隣)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특히 역리학(易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주역(周易)』, 『역학계몽(易學啓蒙)』, 『기삼백(朞三百)』, 『태극도(太極圖)』, 『율려신서(律呂新書)』 등을 이해하기 쉽도록 도표로 그리고 설명을 첨가하여 주해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에 고심정(古心亭)이라는 정자를 세웠으나,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
[학문과 저술]
김근행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용재문집(庸齋文集)』 15권이 있으나,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김근행은 1759년(영조 35) 김포(金浦) 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학교를 설치하여 지성으로 학문을 권장하였다는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임금으로부터 『소학(小學)』 한 질을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