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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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상태 |
[정의]
조선 후기에 여환(呂還)과 함께 역모를 꾀한 인천 출신 인물.
[가계]
여환의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하여 인천도호부가 인천군으로 읍격이 강등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가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활동 사항]
여환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는 실록의 기사에 황회(黃繪)는 영평(永平)의 지사(地師)라고 나타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황회는 풍수지리에 근거해 집터나 묏자리 따위를 가려잡는 일을 업으로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불을 자처한 승려 여환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가 인천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당시 도호부였던 인천이 1688년(숙종 14)~1696년(숙종 22) 1월까지 현으로 강호(降號)되었다. 강호는 고을의 위격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역부도(大逆不道) 또는 강상죄인(綱常罪人)이 그 고을에서 나타나게 되면 읍호를 낮추었다.
1688년(숙종 14) 여환이 일으킨 역모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환은 아내 원향(遠香)과 무녀인 계화(戒化), 상한(常漢) 정원태(鄭元泰), 그리고 황회 등을 규합하여 양주군 청송면을 중심으로 미륵 신앙을 널리 퍼뜨렸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차차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까지 퍼져 갔다. 여환은 아내를 용녀부인이라 불렀고, 그녀의 신통 변화는 가히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정씨 성을 가진 무당 계화는 정성인(鄭聖人)으로 탈바꿈하여 민중들을 유혹하였고, “7월에 큰 비가 와서 도성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미륵 신봉자들에게 장검과 군복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폭우로 도성이 무너질 때 대궐로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7월 13일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군 대전리(大田里)로 집결시켰다. 무장한 신도들을 양주에 남겨 둔 채 여환 등 10여 인은 15일에 상경하여 비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하늘은 오히려 맑기만 하였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아직은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 하늘이 응하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 16일 양주로 돌아갔다. 보름쯤 지나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고, 여환 등 주모자 여러 사람이 처형됨으로써 이들의 허망한 꿈은 무너졌다.
여환 등은 미륵 신앙과 민간 신앙인 용 신앙을 교묘하게 관련지었고, 또한 무녀들이 이에 적극 합력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여환은 괴수(魁首)로, 황회·정원태·원향·정계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모에 가담한 자들로, 김시동·최영길·이원명·정호명·이말립·정만일은 모두 어리석은 천례(賤隷)로서 요괴(妖怪)한 말에 미혹된 자들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형률(刑律)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처자와 재산을 몰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