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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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祥-猫畓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염승연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박상과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개설]
「박상과 묘답」은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의 탄생과 박상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사동마을에서 채록하였고, 1987년에 창간된 『전남의 전설』과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박상은 1474년 전라도 광산군 서창면 사동에서 태어나 나주목사를 지내고 57세의 나이로 죽은 인물이다. 박상의 아버지는 박지흥(朴智興)[1411~?]으로, 충청남도 대덕군 와동이란 곳에서 살았다. 1453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박지흥은 46세에 처가 쪽으로 살 곳을 찾아 나섰다. 박지흥은 노령산맥을 넘다 날이 저물어 허술한 산막을 찾아가 하룻밤 쉬어 갈 것을 청하였다. 주인 노파는 반갑게 맞이했지만 부부에게 "귀공의 부부가 이곳에 들어 쉬어 가는 곳은 다행이지만, 한번 이 산막에 든 이상, 이곳 입암산 산신령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살아갈 수 없는 집"이라고 말하였다.
지흥은 임금을 버리고 자신만 살길을 찾아 길을 떠난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하여 밤새 산신령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빌다 쓰러져 잠이 든 지흥의 꿈에 나타난 산신령은 "네 죄를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 의분(義憤)을 느낀 그 심정도 알 만하여 네가 살 곳을 골라줄 터이다. 밖에 나가 내가 매어 둔 쌍마를 타고 가다가 말이 멈추는 곳에 말 한 필을 매어 표를 해 두고 돌아오라"고 말하였다. 박지흥이 산신령이 시키는 대로 하자, 입암산 산신령의 백마는 광주목 방하동 방마산 남쪽에 이르러 멈추었다. 말 한 마리를 매어 놓고 입압산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박지흥은 꿈에서 깨었다.
이후 지흥은 아내와 함께 방하동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는데, 방하동 북쪽의 방마산은 오늘날 백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산 지 2년 후, 부인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죽자 박지흥은 동네의 서씨와 결혼하여 8년 만에 큰아들 박정을 낳았다. 1463년 8월의 어느 날, 지흥은 부인 서씨와 함께 고향을 찾아 갈재를 넘다 입암산 아래에 있는 산막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부인 서씨는 꿈에 입암산 위에 있는 큰 바위가 굴러 내려와 서씨의 치마폭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이듬해 5월 18일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박지흥은 아이의 태몽을 따라서 아명(兒名)을 '입암'이라 하였고, 뒤에 상(祥)으로 고쳤다.
이후, 박상은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3세에 진사에 입격(入格)한 뒤, 29세에 시강원(侍講院)을 거쳐 32세에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이 당시 조선 시대의 지방 도사는 지방 관리의 불법을 규찰하고 과시(科試)를 주관하는 관직이었다. 박상이 전라도사가 된 당시 조정에는 연산군이 왕위에 있었던 때였다. 이때 나주에 사는 황쇠부리라는 사람의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 되자 황쇠부리는 나주목사(羅州牧使)를 부리고 토지를 강탈하거나 남의 처자를 빼앗는 등 세도(勢道)를 부려 일대의 원성을 샀다. 이에 나주목사가 황쇠부리의 행패를 고발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황쇠부리는 즉시 딸에게 소식을 전해 나주목사의 목을 자르도록 하였다.
하지만 박상은 의기가 강직하여 1506년 8월에 나주로 내려가 황쇠부리를 때려 죽였다. 이후 박상은 바로 나주목사에게 사직서를 전한 다음, 직접 왕에게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자백하기 위해 상경길에 올랐다. 그러나 박상이 입암산 갈재에 이르렀을 때, 큰 고양이가 길을 막아서며 타고 있던 말을 위협하였다. 박상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다. 박상은 고양이가 마치 따라오라고 시늉하는 것을 보고, 그 고양이를 따라갔다. 며칠을 달려 고양이가 박상을 데려간 곳은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正陽寺)이었다. 정양사 주지는 절에 있던 고양이가 박상과 함께 돌아온 사정을 듣고, 박상에게 신령의 원력(願力)이 미친 것으로 생각하여 며칠간 머물게 해 주었다.
연산군은 자신의 비(妃)로부터 박상이라는 자가 비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시켜 박상을 잡아오게 명하였다. 하지만 금부도사는 박상이 상경하던 길과 엇갈려 정양사에 은신한 박상을 체포할 수 없었다. 한 달 후인 9월, 연산군은 중종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고, 박상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박상은 중종(中宗)[재위 1506~1544]의 부름을 받아 담양군수, 순천부사를 지낸 뒤에 57세에 사동에서 죽었다. 박상은 죽기 전에 하남면 오산리에 있는 땅 수십 마지기를 사서 정양사에 주고, 자신을 살려준 고양이를 먹이는 데 쓰도록 하였다. 이 묘답(猫畓)은 한일합병 당시까지 하남면 오산리에 있었는데, 금강산에 있던 정양사라는 절에서 수곡(收穀)을 하였다. 현재 묘답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충주박씨 집안에서는 고양이를 아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박상과 묘답」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의 비범성'으로 볼 수 있다. 박상의 아버지인 박지흥은 성균관 진사시에 입격하여 조선 전기 세조(世祖)[1417~1468] 때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염증을 느껴 처가가 있었던 전라도 광주 서창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박상의 세 아들은 문장이 월출하여, 송나라에 삼소(三蘇)[소순, 소식, 소철]가 있다면 조선에는 삼박(三朴)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박상과 묘답에 관한 설화는 광주 지역에 다수 전해지고 있다. 광산구 진곡동 오산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오산리의 괴밥사리」와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박눌재와 고양이」도 비슷한 내용이다. 하지만 「박상과 묘답」 이야기에서는 박상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박지흥이 광주 서창으로 정착한 배경설화와 박상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었다. 이렇게 박지흥의 이야기와 박상의 태몽이 함께 언급된 것은 박상의 성품과 능력이 태어날 때부터 특별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박상이 비범한 능력과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 박상이 전라도사로 부임하여 연산군의 장인을 죽이고, 그 죄를 자백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갈 때 고양이가 박상을 구해 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