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에 제작된 각 지방 지도 중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한 경기도 인천부 지도. 19세기 후반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혼란과 관료 사회의 부패 등으로 혼탁해진 조선 내정에 대한 대대적 개혁에 나섰다. 또한 그는 두 차례 서양 세력의 공격[양요]에 맞서면서 군사, 치안 등에 대해서도 정비를 도모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실시된 읍지와 지도의 편찬은 그러한 개혁...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이 속해 있었던 조선 시대의 면. 다소면(多所面)은 ‘농사를 짓는 곳이라 물이 많다’는 뜻의 ‘다수(多水)’에서 비롯됐다는 등의 해석이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 다소면이 생긴 것은 조선 시대 면리제가 시행되면서부터이다. 영조(英祖) 때의 『여지 도서(輿地 圖書)』 ‘인천도호부’에 의하면 다소면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과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이 소속되었던 조선 시대의 면. 부내면(府內面)은 ‘부내(府內)’, 즉 ‘부(府)의 안쪽’이라는 뜻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이는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에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면리제가 시행됨에 따라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다소면(多所面)과 부내면이 생겼다. 부내면에는 청사가...
1757년~1765년에 조선 전국 읍지를 모아 만든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한 전국 읍지.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에 걸쳐 조선의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이다. 총 55책으로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및 1개의 진지(鎭誌) 등 총 313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1757년(영조23)...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역사적 내력.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 일대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곳 중 하나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27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옛 소년 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서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고인돌을 통해 이미 선사 시대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하고 있는 1899년에 편찬된 인천부의 읍지. 전통 시대 관찬 지리지의 편찬은 국가의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고 각 지역의 환경, 역사적 상황을 파악하여 원활한 통치 행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조선의 경우 『세종실록지리지』를 시작으로 하여 중종 대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하였고, 영조 대에는 전국적으로 읍지를 총합한 『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 소금은 인간의 생리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영양소를 공급하며,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 맛을 내는 대표적 조미료이다. 소금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소금을 생산·유통·소비하는 인간의 활동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은 해수(海水)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은 자염(煮鹽)...
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하는 인천도호부에 설치된 지방 군사 조직. 조선 전기에는 함경도·평안도 등의 북방 국경 지대는 군익도(軍翼道) 체제로 국경 방어에 임하였고 그 밖의 남방 지대는 연해(沿海) 요지에 진(鎭)을 설정해 영진군(營鎭軍) 혹은 기선군(騎船軍)을 두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반면, 내륙 지방은 모든 지방 수령에게 병마직(兵馬職)을 겸하게 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