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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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했던 인주 이씨(仁州李氏)로 인해 붙여진 인천 지역의 옛 명칭. 경원군(慶源郡)은 인천의 옛 명칭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인주 이씨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인주 이씨가 왕실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허겸(李許謙)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 때의 일이었다. 이자연의 세 딸이 모두 문종(文宗)의 비로 뽑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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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ㆍ고려ㆍ조선 시대에 지금의 인천광역시를 포함한 지방 제도. 군현제는 한반도에 일찍부터 전해져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에는 초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주변 소국을 점령할 때마다 군현(郡縣)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나, 일반적으로 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통상 한국에 군현제의 등장은 신라 지증왕(智證王)[437~514] 때 주요 군사 지역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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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던 인천군(仁川郡)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호는 괴정(槐亭)이다. 아버지는 김로(金輅)이고, 할아버지는 김광부(金光富), 증조할아버지는 김지예(金之銳)이다. 김숙검(金叔儉)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417년(태종 17) 정유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 직제학(弘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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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를 포함한 인천 지역의 고구려 때 지명. 통일 신라 한주 소성현(邵城縣)의 고구려 때 지명으로 다른 기록에는 미추(弥鄒, 彌鄒) 혹은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류(孺留)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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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가 도읍지로 정했던 지역. 백제의 시조인 온조와 그의 형인 비류는 고구려로부터 남하하였는데,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였고 동생인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초기 백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미추홀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고 미추홀의 중심 유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문학 산성이다. 하지만 문학 산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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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인천군(仁川郡)의 지인천군사(知仁川郡事)를 지낸 문신. 1418년 3월 지인천군사로 부임하여 같은 해 10월까지 약 7개월간 복무하다가 모친상을 만나 사직하였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의지(宜之)이다. 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민중리(閔中理), 어머니는 진주 유씨(晉州 柳氏)로 고려 말 삼사좌사(三司左使)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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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이 속했던 행정 구역 명칭.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일제는 종전까지 군(郡)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던 지방 행정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 행정력이 지방 하부 단위까지 미칠 수 있도록 면(面) 중심의 지방 행정 체제 개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10년 「조선 총독부 지방관 관제」와 「면에 관한 규정」을 공포해 면을 최하급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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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편찬된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포함하는 인천군(仁川郡)에 관한 정보가 담긴 지리지.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제148권에서 제155권에 실려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조선 왕조 개창 초기 전국 단위의 지리지 편찬 사업 과정에서 완성되었다. 현재 주로 이용되는 것은 태백산 사고본이다. 태백산 사고본은 모두 사본으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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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때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한주(漢州)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으나,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었다. 통일 이후 확대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685년(신문왕 5) 신라는 전국을 9주(九州)로 개편하였고 5소경(五小京)을 정비하였다. 신문왕의 지방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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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역사적 내력.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 일대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곳 중 하나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27년에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학익동 옛 소년 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서 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고인돌을 통해 이미 선사 시대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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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군의 지군사로 역임한 인물. 유양식(柳楊植)은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재직하다 1443년(세종 25) 9월 인천 지군사(仁川知郡事)로 부임하여 1445년(세종 27) 7월 내섬시(內贍寺)[조선 시대에 각 궁(宮)에 올리던 토산물, 이품 이상 벼슬아치에게 주던 술, 일본인·여진인(女眞人)에게 주던 음식과 필목(疋木) 따위를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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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가 외향인 세조의 비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아버지.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온지(溫之)이며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이름은 번(磻)으로 쓰기도 한다. 아버지는 윤승례(尹承禮)이며, 인천의 토성(土姓)인 인천 이씨 이문화(李文和)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은 윤사분(尹士昐)·윤사윤(尹士昀)·윤사흔(尹士昕)이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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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 지리적 요소. 인문 지리는 특정 지역의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들이 생활하며 만들어 낸 여러 가지 현상들이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나누어 만든 위치와 면적, 행정 구역의 변화, 인구 변화, 경제, 사회, 교통, 문화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는 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區)로, 동쪽으로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쪽으로는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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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이훈익이 쓴 향토지. 인천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지명 변천이 심했던 곳이다. 특히 조선 후기 수동적인 개항 이후 외래문화가 들어와 한바탕 큰 변화를 겪었고, 지명 변천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 큰 계기는 1914년 일제에 의해 추진된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었다. 일제가 전국적으로 자연 촌락 이름을 한자화하면서 유래에 대한 고찰 없이 즉흥적으로 훈차(訓借), 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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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 구(區)는 서울특별시, 5대 광역시 및 인구 50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 설치되는 하부 행정 구역으로, 국가가 위임한 사무를 처리하는 보통 행정 구역이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다.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는 도화동(道禾洞), 숭의동(崇義洞), 용현동(龍現洞), 학익동(鶴翼洞), 주안동(朱安洞), 관교동(官校洞), 문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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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의 행정 기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청은 골목골목까지 행복한 미추홀구를 만들기 위해 '함께 누리는 복지 평등을 위한 같이 잘 사는 미추홀구', '주민 밀착형 행정을 위한 진짜 잘 사는 미추홀구',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다시 잘 사는 미추홀구', '주민과 소통하는 말이 통하는 미추홀구', '마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더할 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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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했던 지역의 지방 관아 또는 행정 구역 이름. 고려 시대 수주(水州)의 한 속현이었던 소성현은 인주 이씨가 왕실의 외척이 되면서 비로소 인주(仁州)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고려 말에 이르면 경원부(慶源府)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경원부는 1392년(공양왕 2)에 경기도를 확장하고 좌도와 우도로 도를 나눌 때, 양광도(楊廣道)에서 경기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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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한 인천의 읍격(邑格) 변화. 우리나라에서 지방 행정 제도로서의 주·군·현이 등장한 것은 신라 중대였다. 하지만 주·군·현이 한 고을의 등급을 나타나는 것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후삼국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자신을 지지하거나 도움을 준 읍들에 대해 읍호를 주(州)로 승격시키고, 자신을 배반하는 호족이 나오는 경우 해당 출신 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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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 소금은 인간의 생리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영양소를 공급하며,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 맛을 내는 대표적 조미료이다. 소금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소금을 생산·유통·소비하는 인간의 활동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은 해수(海水)로 소금을 생산하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은 자염(煮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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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의 역사. 1392년 조선이 개국하였지만 아직은 전 시대인 고려 시대의 행정 제도를 정비하지 못하였다. 인천이라고 하는 지명은 조선이 개국하여 1413년(태종 13) 지방 행정 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질 때까지 등장하지 않으며, 인주(仁州)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군현제의 정비는 고려 시대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속현의 주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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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홍상검(洪尙儉)이다. 홍약치(洪若治)[?~?]는 1447년(세종 29년) 친시(親試)에 합격하고 교리를 지냈다. 1452년(문종 2)에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후 승문원 부교리(承文院 副校理)로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주관이 되어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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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여환(呂還)과 함께 역모를 꾀한 인천 출신 인물. 여환의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하여 인천도호부가 인천군으로 읍격이 강등되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가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여환 사건의 전말을 알려주는 실록의 기사에 황회(黃繪)는 영평(永平)의 지사(地師)라고 나타나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황회는 풍수지리에 근거해 집터나 묏자리 따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