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2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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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of Yeosu, which Led up to Korea's Independenc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호 |
[개설]
일제강점기 여수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로 청년과 학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여수 지역에서는 일부 면에서 산발적 시위는 있었으나 대규모 만세시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가담했던 재경 여수유학생들이 조직한 맞돕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항일의 기운이 유지되었는데, 이는 곧 태평양전쟁 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42년에 벌어진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학생들의 반일운동 전개에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
여수 지역의 3·1운동은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4월 1일에 쌍봉면과 소라면, 율촌면 등 세 개 면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또 4월 1일 밤에는 돌산면과 화정면, 남면, 삼산면 등 네 개 면에서 어민들이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일부 어민들은 어선에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부르면서 일본 어선을 향하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어서 빨리 너희 나라로 가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 12일에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귀향한 유봉목(兪鳳穆)은 당시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재학생인 이선우(李善雨)와 더불어 주로 학생층을 대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다가 종포에 사는 같은 학교 학생인 조(趙)모의 밀고로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검거돼 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유봉목은 징역 10월, 이선우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청년운동]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수의 유학생들은 ‘재경여수유학생회’를 만들어 평소에도 상호간의 친목과 단결을 돈독히 하였다. 3·1운동이 터지자 이들은 전단을 인쇄하거나 뿌리기도 하고, 연락을 도맡고 나서는 등 직접·간접으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한 경우가 많았다.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온 유학생들은, 무엇인가 민족을 위하여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는 데에 뜻을 모으고, 우리 민족이 서로 믿고 맞잡고 돕자는 뜻에서 1921년 5월경 ‘맞돕회’라는 계몽단체를 만들었다. 그후 맞돕회 회원들은 부녀자층을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종문서를 태우는 등 사회개혁운동을 펴는 한편,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을 펴기 위한 일환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 여수청년회관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수청년회관은 당시 좌수영의 좌청 건물을 입수하여 건축자재를 확보하고 관문동의 덕지라는 연못을 메워 2층의 한옥과 양옥을 절충하여 건립한 건물로서, 여수 청년들의 기개를 널리 선양하였다.
[학생운동]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한 소식이 여수에 전해지자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학생 2백여 명은 즉시 궐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12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9명의 학생에게는 정학 처분이 내려지자 1930년 1월 28일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학생들은 퇴학 또는 정학된 학생들의 조속한 복교와 구속학생의 석방을 촉구하는 맹휴를 감행하였다.
새 학년이 시작되자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재학생들은 졸업생인 윤경현(尹炅鉉)의 협조를 얻어 광주학생운동의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기숙사와 등대산, 종고산, 장군도, 또는 종포에 있는 하숙집 등을 전전하면서 매주 한 번씩 집회를 가졌다.
그해 10월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 재학생들은 광주학생운동 관계로 처벌을 당한 백인렬의 조속한 복교 조치와 교사진 및 학교 시설의 보강을 요구하는 맹휴를 벌였다. 이 맹휴사건으로 22명이 검거되었고, 결국 이용기(李容起)와 윤경현(尹炅鉉)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나머지 20명도 옥고를 겪고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당시 퇴학 처분을 당한 학생 명단을 보면, 3학년 학생으로는 이용기·정학조·오놀보·곽재석·김봉칠·진자미·김양호이고, 2학년 학생으로는 백인렬·조병호·정보한·차용헌·박경임·강임룡·김재곤·정림구·이금룡·박창래, 1학년 학생으로는 고자화·이창용·손대형·강근오 등이다.
맹휴사건 이후 여수공립간이수산학교는 겉으로는 잠잠한 듯 보였는데, 이는 학교와 일제의 감시가 여간 삼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던 1940년대에는 일본인 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인 학생들을 감시하게 하여, 한 번 제보가 들어가면 교무실로 끌려가 호된 기합을 받았으며, 세 번 이상 적발되면 정학 처분이 내려지는 등 가혹한 단속이 계속되었다.
이에 1942년 당시 졸업반 학생대표이던 박용수(朴容守)와 김옥(金玉), 이강제(李康濟) 세 사람은 각 학년 대표들과 은밀히 짜고, 각 학년별로 태극기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해 주고 언젠가 전 학생이 한번 들고일어나 한국 학생들의 기개를 단단히 보여 주자고 벼르고 있었다.
1942년 11월 상순의 어느 기념식날 아침, 교장 고토 히로요시[後藤廣吉]가 일본 천황이 ‘청년 학도에게 내리는 조서’를 낭독하려 하자 전 학생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삼삼오오 열을 지어 교문을 빠져 나와 버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모국어 사용과 민족 차별이 심한 교사의 퇴출을 요구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후 일본 경찰은 주모급 학생들의 집을 급습하여 태극기를 찾아내고 60여 명의 관련자들을 검거해 버렸다. 그 결과 주모자 박용수, 이강제, 김옥 세 사람은 구속 송치되고 나머지는 훈계 방면되었다. 이들 세 사람은 광주로 송치되었다가 이다[依田] 검사에 의해 기소 유예로 풀려났으나 학교에서는 퇴학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