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625 |
---|---|
한자 | 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석봉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념 체계.
[개설]
유교의 교리는 공자의 인의(仁義) 정신으로 윤리 도덕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도(大道)를 실천하고 보급하여 도의사회(道義社會)를 건설하자는 유학 정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유교는 현실성을 중시하고 현실 문제를 개혁하려는 데 중점을 둔 교학 사상으로 내세나 이면 세계, 사후 세계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넓은 의미의 유교는 학문적 경학적 의미를 지닌 유학(儒學), 경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술(儒術),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유교(儒敎), 성리학적·의리학적 의미를 지닌 유도(儒道) 등을 그 안에 포괄하고 있다.
[유학자]
여수 지역의 대표적 유학자로는 조선조 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태어난 귤은 김유(金瀏)를 들 수 있다. 일찍이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칠 정도로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거문도에 낙영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1854년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를 무단으로 침범했을 때 통상 교섭을 원한다는 그들의 뜻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내용이 김유의 문집에 「해상기문」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 문서는 우리나라와 서양이 최초로 작성한 외교 문서라고 볼 수 있다.
노사 기정진과 귤은 김유 문하에서 수학했던 거문도 유촌마을 출신의 귤당 박규석은 경사와 문학에 뛰어났으며, 스승인 김유가 타계하자 선생의 유고를 모아 『귤은재문집』을 펴냈으며, 낙영재를 이어받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유와 함께 러시아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눈 만회 김양록도 모두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 출신이다. 이 외에도 1937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여수의 대표적 유학자 겸 유림들로 정상백을 포함한 59명이 실려 있다.
[유교 유적]
1. 향교
여수향교는 여수시 군자동 165번지[군자길 46] 종고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동서재·풍화루가 있고, 기타 2동의 부속 건물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940년(태조 23)에 여수부(麗水府)가 설치됨에 따라 여수의 동북쪽 2리 밖 대곡동(大谷洞)에 향교가 창건되었다고 하나, 다른 향교의 설립과 그 시기를 견주어 보면 신빙성이 없다. 돌산향교는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304번지, 군내리 동쪽 석전평(石田坪)에 자리잡고 있다. 돌산향교 내에는 대성전·명륜당·동재와 서재, 기타 4동의 부속 건물이 있다.
2. 서원과 사우
서원과 사우는 조선 중기와 후기 향촌 사회의 성격과 사족들의 정치적·사회적 동향을 살펴보는데 매우 중요하다. 본래 서원과 사우는 설립 목적이나 기능, 명칭에서 구별되었는데, 서원이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에 목적을 두면서도 강학 기능에 비중을 둔 반면, 사우는 문중 인물에 대한 제향 등 향사 기능에 더 비중을 두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서원이 남설(濫設)되면서 서원과 사우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둘 다 향사 기능이 중시되었다. 여수의 향사로는 충민사, 구암별묘, 영당, 이대원장군 사당, 오충사, 송산사, 귤은당, 서산사, 관왕묘, 화산사가 있다.
[현황]
유교는 향민들을 교화하고 유교적 소양을 지닌 후학들을 양성하는 등 여수 지역의 향촌 사회를 지탱하는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해왔으나 근대 사회가 형성되면서 그 역할이 소멸되고 이제는 음력 2월과 8월 춘추대길(春秋大吉)에 제례(祭禮)만을 거행하고 있다. 2008년 현재 여수시의 『통계연보』에 집계가 잡혀 있지 않고, 다만 1981년 유교 신도라고 답한 여수 사람은 3,356명이었고 여자는 통계가 없었다.
[의의와 평가]
하삼도(下三道) 대부분 지역이 유배지였고, 고려 말 여수현령이었던 오흔인이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불복함으로 해서 여수가 반역향으로 지목받아 현을 폐하여 순천도호부에 예속시켰다. 이후 여수 지역민을 고통스럽게 했던 삼복삼파(三復三罷)의 과정을 거쳐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에 돌산군이 설치되었다. 다음해인 1897년 5월 16일 여수군이 설치됨에 따라 그해 여수와 돌산에 향교가 신설되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약 50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관계로 문인보다는 무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로 인해 여수의 유학이 다른 지방에 비해서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