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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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世憲 |
이칭/별칭 | 사전(士典),우암(牛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476년 - 이세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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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04년 - 이세현 생원시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55년 - 이세헌 사망 |
출생지 | 양곡 -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 |
거주|이주지 | 빙혈, 빙암 -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
묘소|단소 | 광석 -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
사당|배향지 | 광석재 -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699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천(永川) |
대표 관직|경력 | 생원 |
[정의]
조선 전기 의성에 거주했던 학자.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전(士典), 호는 우암(牛巖). 증조할아버지는 이려(李麗), 할아버지는 생원(生員) 이사형(李斯亨), 아버지는 증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贈 通訓大夫 通禮院 左通禮) 이종림(李宗林), 어머니는 장수산(張壽山)의 딸 증 숙인(贈 淑人) 옥산 장씨(玉山 張氏)이다. 부인은 한보정(韓保井)의 딸 증 숙부인(贈 淑夫人) 청주 한씨(淸州 韓氏)이다. 이세헌의 후손들 중 일부가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에 정착하면서 현재도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활동 사항]
이세헌(李世憲)[1476~1555]은 1476년(성종 7) 경상도 군위현(軍威縣) 양곡(良谷)[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문예에 뛰어나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에도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급제하였지만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향촌에서 학문 연구에 주력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우암(牛巖)에 은거하여 날마다 도의(道義)를 닦았다.
1519년(중종 14)에 이자(李耔)[1480~1533]가 천거하여 현용(顯用)하려 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세헌은 젊은 시절부터 의성현의 빙암(氷巖) 또는 빙혈(氷穴)[현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소재]에서 노닐며 거주하였는데, 의성 현령으로 부임해 있던 이자는 빙암에 있던 이세헌을 찾아가 교유했다고 한다. 기묘사화 이후 다시 향촌에 은거하였는데, 당화(黨禍)에는 초연했으나, 때로 정령(政令)의 허물을 들을 때는 문득 큰 잔을 가져다가 술을 통음(痛飮)하고 분연히 말이 없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우암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주력하니 주위에는 이세헌을 흠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1555년(명종 10)에 세상을 하직했다.
[묘소]
묘는 군위현 서쪽 광석(廣石)[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소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후손들의 현달로 좌승지(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유허비(遺墟碑)가 건립되었는데,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지은 것이다. 구 유허비는 현재 대구광역시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광석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운 유허비각(遺墟碑閣)은 군위군 군위읍 내량리에 건립되어 있다.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 699번지에는 이려와 이세헌을 기리기 위해, 의성현 출신의 후손 이정기(李廷機)[1613~1699]가 건립한 광석재(廣石齋)[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