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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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玉頓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명구 |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옥돈(金玉頓)[1889~1975]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대사리 출신으로, 의성군에서 3월 15일에서 19일까지 가장 대규모로 전개된 안평면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에서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1~12일 경 그는 이화실의 집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3월 15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후 대사동 교회 영수 이종출과 김옥돈, 집사인 이화실과 이양준을 비롯한 4명이 남아 예배를 보는 것처럼 위장하여 시위를 모의 하였다. 그들은 이날 밤 7시경 마을 뒷산에서 교인과 마을 주민 60~70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밤 10시경 해산했다. 이 시위는 3월 15일부터 4일간 계속되었고, 19일에는 도리원 장날 장터에서 대대적 시위를 벌이고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의성 경찰서로 몰려가 구속 중인 동지들을 구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김옥돈(金玉頓)·이만준(李萬俊) 등 주동자들은 면민들에게 도시락을 가지고 도옥동 앞 냇가, 일명 독밭거리[석전(石田)]에 모이도록 이르고 마을마다 다섯 명 단위로 동원 책임자를 선정하였다.
김옥돈·이양준 등이 중심이 된 이 시위의 숫자는 7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시위 행렬이 ‘흰재’ 마루에 다다랐을 때 이미 정보를 입수하고 총으로 무장한 도리원 주재소 순사들이 출동하여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 군중은 몽둥이와 돌멩이를 가지고 주재소로 몰려가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며 격렬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주재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시위 군중은 일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선두에 서 있던 권해운·이양준·이봉수·김일석·이용학·이리경·권사연·김도식·정흥록 등 9명이 총상을 입었고, 권해운은 출혈이 심하여 대구로 호송 도중 숨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월 13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1년 6월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