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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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國馨 |
이칭/별칭 | 선각(先覺),달촌(達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부(粹夫), 호는 달촌(達村). 초명(初名)은 윤선각(尹先覺)이나 윤국형(尹國馨)으로 개명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 윤지숭(尹之崇)이고, 할아버지는 이성 현감(利城縣監)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정림(尹廷霖)이고, 아버지는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희렴(尹希廉)이다. 부인은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의 후손인 경력(經歷) 조수(趙琇)의 딸 평양 조씨(平壤 趙氏)이고, 아들은 윤경립(尹敬立)이다.
[활동 사항]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1543년(중종 38) 경상도 의성현에서 태어났다. 1568년(선조 1)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좌승지를 역임하였고, 1586년에 사간(司諫)을 지냈다. 1592년 충청도 순찰사를 거쳐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금강에 나가 방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서 1598년에 명나라 장수 양포정(梁布政)의 접반사(接伴使)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다. 이호민(李好閔)·유성룡(柳成龍) 등과 정국을 함께 운영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유성룡이 실각할 당시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1605년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복귀하였으며, 1607년 동지사(同知事)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좌윤·대사성·대사헌·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609년에 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 이듬해에 공조 판서를 역임한 후 161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직책에 충실하였고 영달을 꾀하지 않은 문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일종의 수필집인 『문소만록(聞韶漫錄)』이 있다. 친지(親知), 고구(故舊)에 관한 사적(事蹟)·일화(逸話) 및 저자가 직접 관여한 시정(時政)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며, 특히 임진왜란에 관한 기술이 많고 고사(故事)도 언급하고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권55에도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