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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94
한자 河相勳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손민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가|독립운동가|상업인
성별
대표경력 인천시 의회 부의장
출생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하상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하상훈 동아 일보 제1대 인천 지국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대 - 하상훈 인천 물산 객주 조합 부조합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하상훈 신간회 인천 지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하상훈 인천 상공 회의소 초대 회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52년 - 하상훈 인천시 의회 부의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하상훈 제2공화국 참의원 당선
몰년 시기/일시 1964년 10월 3일연표보기 - 하상훈 사망
묘소 하승훈 묘소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산102 관교 근린공원 등산로지도보기

[정의]

인천광역시의 상공업계나 정치계, 사회계에서 활약한 인물.

[가계]

내리 교회 창설 요원인 아버지 하운기와 어머니 배 씨 슬하에서 태어났다. 김동자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는데,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3남 하예용이 6·25 전쟁 때 실종되었는데 하예용의 아들 하달웅이 20여 년 동안 하상훈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활동 사항]

하상훈(河相勳)[1881~1964]은 영화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동아 일보 제1대 인천 지국장을 역임했다. 또한 하상훈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1920년대 인천 물산 객주 조합 부조합장을 맡아 민족 상권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 하상훈은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國樂) 동호회인 이우 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하상훈은 1927년 신간회(新幹會) 인천 지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일제에 의해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하상훈은 1945년 한국 민주당 인천 지부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1946년 인천 상공 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1952년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48년 인천시 고문회장, 1952년 초대 인천시 의회 의원으로서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상훈은 1964년 별세하였고, 하상훈의 장례는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되었다. 하상훈의 장례식은 김정렬 전 인천시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축현 초등학교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묘소]

하상훈의 묘소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관교동 산102번지 관교 근린공원 등산로에 있다. 묘소는 1973년 6월 22일 하상훈의 처 김동자가 별세한 후 합장한 것으로, 손자 하달웅이 묘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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