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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전 행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32
한자 三一聖典行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념식
관련인물/단체 조봉암|이범진|하상훈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3월 1일연표보기 - 3·1 성전 행사 개최
발생|시작 장소 인천 공설 운동장 - 인천시 도원동

[정의]

1946년 해방 후 첫 3·1절을 맞아 인천시 도원동에 있는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기념식.

[경과]

해방 후 인천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3·1절 기념행사는 당초 좌·우익 정당 간에 연락이 없이 각자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다가 3·1절 행사를 통해서라도 좌·우익 양측이 일치단결하여 치르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아 1946년 2월 20일 인천시 경동 한국 민주당 인천시 지부에서 3·1 독립운동 기념 대회 준비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는 공산당과 인민당, 한국 민주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과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 단체, 사회·노동·문화·신문·통신·공장 등의 각 단체 대표자 1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서울 중앙 정계의 동향과는 관계없이 인천만은 당파를 초월하여 전 민족적 성전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써 민족적 단결을 세계에 과시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겨레의 자주 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첫째, 인천시 전역은 가가호호 태극기를 빠짐없이 게양할 것, 둘째, 기념행사를 위해 준비 위원 71명을 선임하며, 셋째, 기념 대회의 회장은 3·1 운동 주동 단체였던 천도교회와 기독교회로부터 각기 1명씩을 추대하기로 하고, 인천시장을 고문으로 위촉하는 한편 인천 금융 조합 강당에 임시 사무소까지 설치하였다. 실무적인 준비를 위해 총무부와 기획부, 진행부, 재정부, 경호부, 설비부, 선전부를 두었다.

[결과]

1946년 3월 1일 당일 인천시는 해방 후 첫 3·1절을 맞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여 전 시가가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었으며, 모든 공장과 사업장도 이날을 경축하기 위해 휴업하였다. 각 동민들은 동회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학생과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각기 경축식에 참석한 다음 오전 11시를 기해 인천의 중앙 경축 식장인 인천시 도원동에 있는 인천 공설 운동장에 5만 명이 모여 기념 축하식을 가졌다. 당시 인천의 인구가 21만여 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파였다.

조봉암의 사회로 식순에 따라 국기 게양과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묵념이 있은 후, 곽상훈의 개회사, 혁명 투사에 대한 하상훈의 감사 인사, 이범진의 독립 선언서 및 결의문과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미 군정 인천시 군정관 스틸멘의 축사와 이기정의 폐회사로 기념행사가 순조롭게 끝난 후 대회장인 김영섭 목사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 연합군 만세.”를 삼창한 뒤 시가행진을 끝으로 당일 오후 4시 제2 송림 초등학교 앞에서 모든 행사가 종료되었다.

[의의와 평가]

1946년 3·1절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경축일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염원과는 달리 3·1절은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민족 구성원이 단합된 행사로 치러지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인천에서 정치적 좌·우익은 물론 종교와 사회·노동계까지 망라하여 단결된 힘으로 3·1절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러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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