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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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䄄 |
이칭/별칭 | 은언군(恩彦君),명흥(明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심효섭 |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이 속했던 강화도에 살았던 왕족.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숙빈(肅嬪) 임씨(林氏)이다.
[활동 사항]
조선 영조(英祖)에서 순조(純祖) 연간에 생존하였던 왕족인 이인(李䄄)[1755~1801]은 1764년(영조 40), 10세 때에 작호(爵號)를 받아 은언군(恩彦君)에 봉해지고, 13세에 유학 송낙휴(宋樂休)의 딸과 혼인하였다. 영조 생존 시에는 검소하지 못한 생활을 한다 하여 관직에 서용되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시전 상인에게 빚을 진 일이 발각되어 직산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어 3년 만에 풀려났다. 영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으며, 그 공으로 1777년(정조 1)에 품계가 올라가 흥록대부(興祿大夫)에 올랐다. 아들 이담(李湛)을 정조(正祖)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게 하려 했던 홍국영(洪國榮) 일당이 홍국영 사후 음모가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상계군(常溪君) 이담을 독살하였다. 은언군은 상계군 독살 사건과 연루되어 1786년에 강화도 유배를 가게 되었다. 1789년에 강화도 탈출 후 붙잡혀 다시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여러 번의 생명의 위협을 정조의 비호로 무사히 넘기게 되었으나,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처와 며느리가 영세를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사사되었다.
[묘소]
묘소는 전하고 있지 않으나 묘비가 서울 역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849년 손자인 덕완군(德完君)이 철종(哲宗)으로 즉위하자 작위가 복구되었고, 대왕대비 순원 왕후는 은언군 집안의 역모에 관한 일을 적은 모든 문적의 세초를 명하였다. 1851년에 대제학 서기순(徐箕淳)은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사사된 은언군의 무죄를 변증하는 주문(奏文)을 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