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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468
한자 朴齊純
이칭/별칭 평재(平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황은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친일파 관료
성별
본관 반남(潘南)
대표관직 인천 부사 겸 감리 인천항 통상사무|외부 대신
출생 시기/일시 1858년 12월 7일연표보기 - 박제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박제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88년 5월 19일연표보기 - 박제순 인천 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90년 9월 10일 - 박제순 인천 부사 이임
몰년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박제순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1년 8월연표보기 - 박제순 선정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11월 6일 - 박제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출생지 박제순 출생지 - 경기도 용인
부임|활동지 인천도호부 청사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53[문학동 343-2]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인천 감리서 - 인천광역시 중구 개항로 45번길 21-27[내동 83]
선정비 박제순 영세 불망비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인근 보관

[정의]

조선 후기에 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친일파 관료.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평재(平齋)이고, 참정 박홍수(朴洪壽)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박제순(朴齊純)[1858~1916]은 1858년(철종 9)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여, 1885년(고종 22) 정시(庭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이던 과거] 병과(丙科) 3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외교와 통상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주사(主事)를 시작으로 10월 텐진[天津] 주차 서기관, 1884년 1월 기연 해방군 사마(畿沿海防軍司馬), 3월 텐진 주차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1885년 3월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敎理), 5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거쳐 1886년 1월 주차 천진 독리 통상 사무(駐箚天津督理通商事務)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뒤 이조 참의(吏曹參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참의 내무 부사(參議內務府事), 경주 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1888년 5월 인천 부사와 겸직으로 감리 인천항 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로 부임하여 1890년 9월까지 약 29개월간 복무했다.

박제순은 1891~1893년 사이에 호조·예조·이조의 참판을 두루 거쳤고, 그 뒤 장흥 부사(長興府使), 전라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충청도 관찰사 재직 중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 충청남도 공주에서 동학 농민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1895년 이후 외부 협판(外部協辦), 왕명의 출납·군정(軍政)ㆍ숙위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외부 대신(大臣), 육군 참장(陸軍參將),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등을 지냈다. 외부 대신 재직시에는 간도 행정 관리권 교섭 그리고 경흥 및 의주의 개방 등 외교 문제를 다루는 한편, 1899년 ‘조청 통상 조약(朝淸通商條約)’, 1901년 ‘조비 수호 통상 조약(朝比修好通商條約)’, 1902년 ‘조백 수호 통상 조약(朝白修好通商條約)’ 등을 체결하였다.

박제순은 1902년 주청 전권 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1904년 귀국하여 1905년에는 외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일제가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조선[대한제국]에 대한 보호 조약을 추진하자 처음에는 참정 대신(參政大臣) 한규설(韓圭卨)[1848~1930]과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나, 결국 외부 대신으로서 11월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權重顯)[1854~1934],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1865~1919], 학부 대신 이완용(李完用)[1858~1926], 내부 대신 이지용(李址鎔)[1870~1928]과 함께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박제순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의정부 참정 대신에 임명되어 친일 내각의 수반이 되었지만 실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의 반발로 불안한 상태를 유지했다. 1909년 12월 이완용이 저격당한 뒤에는 일시 임시 서리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에 임명되었다. 1910년 6월 총리대신 서리로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8월에는 내부 대신으로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御前會議)에 참석하여 가결에 동조함으로써 ‘경술 국적’으로도 지탄받았다.

박제순은 일제의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中樞院)의 고문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고, 10월 7일에는 ‘조선 귀족령’에 따라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10만 원을 받았고, 7월부터는 조선 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성균관에 설립한 경학원(經學院)[일제 강점기 때의 유교 교육 기관]의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191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제순은 1908년경에 윤덕영(尹德榮), 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교육 진흥과 위생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進坊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직을 역임하였고, 경학원이 설립되자 유림의 태두로 대우받기도 하였으며, 서예에도 능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제순이 인천 부사에서 이임한 지 1년 뒤인 1891년 8월 ‘박제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건립되었다. 최근까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589[문학동 349-2] 인천 향교 앞 석비군에 선정비가 남아있었는데, 2005~2009년 진행된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의 문제제기로 인해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박제순은 친일 인명 사전 편찬 위원회와 민족 문제 연구소의 주관으로 발간된 『친일 인명 사전』에 매국(賣國) 행위로 분류되어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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